풍류도(風流道)
신라의 청년들을 찾아서 ⑥

화랑은 신라의 발전과 삼국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용맹하게 전쟁에 나선 젊은 화랑의 모습을 묘사해 보았다. /삽화 이찬욱

보통의 사람들은 주요한 몇몇 인물들을 규정짓거나, 한 묶음으로 배열하는 걸 즐긴다. 이는 인간의 특성 중 하나다. ‘트로이카(Troika)’는 3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지칭하는 단어.

삼두마차(三頭馬車)로도 번역되는 트로이카는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세 사람, 혹은 어떠한 일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3명’을 의미한다.

1950년대 후반 쿠바에서의 전투가 세상을 뜨겁게 달궜을 때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턱밑에서 젊은 트로이카가 질주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1967), 피델 카스트로(1926~2016), 카밀로 시엔푸에고스(1932~1959)는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트로이카’였다.

조금 가벼운 이야기로 가보자. 한국의 50~60대 중년들은 영화배우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를 한 세트로 엮어 기억한다. 이른바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였다.

중앙일보 기자이자 ‘걸그룹 경제학’의 저자인 유성운(40)은 “2019년 현재 한국 걸그룹의 트로이카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트와이스(TWICE), 블랙핑크(BLACKPINK), 아이즈원(IZ*ONE)”을 지목했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본론으로 진입하기 위한 질문을 던진다. “풍류도를 중심 이데올로기로 신라의 발전과 통일에 기여한 화랑 중 트로이카는 어떤 인물들일까?”

개인의 취향과 선호는 각양각색이다. 앞서 언급한 혁명가와 연예인에 대한 평가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천양지차(天壤之差)이듯, 명멸했던 수많은 화랑에 관한 사람들의 호오(好惡)도 엇갈릴 수밖에 없다.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학자와 예술가 몇 명에게 자문을 얻어 1천500년 전 신라의 ‘화랑 트로이카’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봤다.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생은 비극적으로 드라마틱한, 아버지는 귀족이었으나 어머니가 가야에서 온 공녀. 순수한 신라 혈통이 아니라는 콤플렉스를 가진 ‘문노’.

‘살아 움직이는 미륵’으로 잘생긴 얼굴에 설득력 있는 목소리, 인간과 자연을 노래하는 시를 쓰고, 아름다운 풍경까지 화폭에 담아내는 탁월한 예술적 능력을 가진 ‘설원랑’.

신라의 진골이자 화랑, 내밀왕의 7세손.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 풍채가 좋고 뜻과 기백이 높았던…. 열다섯에 대가야와의 전쟁에 나가 승리 이끌었지만 17세에 사망한 ‘사다함’.

◆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걸 증명한 문노(文努)

풍월주(風月主)는 ‘화랑 중의 화랑’ ‘으뜸 화랑’을 일컫는다.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紀)’엔 1대 위화랑부터 32대 신공까지 32명의 풍월주가 기록돼 있다. 초등학생도 그 이름을 들어봤을 김유신도 등장하고, 삼국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김춘추도 이름을 올렸다. 이중에서 ‘트로이카’를 고르라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 속 어떤 인물이 완벽하게 객관에만 근거해 평가를 받고 있나? 주관의 개입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런 차원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랑은 제8대 풍월주 문노(537∼606 추정)다.

문노의 출생은 비극적으로 드라마틱하다. 아버지는 귀족이었으나 어머니가 가야에서 온 공녀였다. 순수한 신라 혈통이 아니라는 콤플렉스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내 피의 절반은 가야 사람의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가야 출신들을 규합해 화랑 내부에 또 다른 파벌을 만든 건 출생의 한계에서 오는 열등감 극복의 방편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런저런 평가가 있지만 문노가 ‘전투 실력’에서만큼은 화랑 중 최고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드물다. 겨우 열일곱 살에 백제와의 싸움에 참전해 공을 세웠고, 열여덟엔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 고구려 장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왕의 명령이라면 모친의 고향인 가야로의 진군에도 거침이 없었다. 화랑의 군사적 편제 개편에도 적극적이었던 문노는 또 한 명의 ‘빼어난 화랑’이었던 사다함의 검술 스승이기도 했다.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일흔 살 가까이 장수한 문노는 ‘신라 역사상 최고의 맹장(猛將)’으로 추앙받는다.

문노를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후배 화랑’이 있는데 바로 김흠운(金歆運)이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를 빛낸 인물들’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문노가 이끄는 화랑부대에 속했던 김흠운이 세속오계(世俗五戒) 중 ‘임전무퇴’를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서술한 것이다. 그렇다. 옛말처럼 용맹한 장수 밑에 비겁한 부하가 있을 수 없다.

“김흠운은 유복한 생활이 보장된 태종무열왕의 사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순국자의 무용담에 매료돼 눈물을 흘리곤 했다. 백제의 조천성을 공략하는데 참전한 김흠운은 적군이 새벽에 신라 군영을 습격해 혼란이 일어나자, 퍼붓는 화살 속을 뚫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한다. 주위에선 ‘어둠 속에서 싸우다 죽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나서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대장부가 몸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다짐한 이상 어찌 이름 알리기만을 원할 것인가’라는 김흠운의 뜻을 꺾지 못했다. 결국 이 전투에서 김흠운은 전사한다.”

용기와 선량함, 의젓함과 지조를 두루 갖췄던 17세 소년 화랑 사다함의 모습을 상상해 그렸다.   /삽화 이찬욱
용기와 선량함, 의젓함과 지조를 두루 갖췄던 17세 소년 화랑 사다함의 모습을 상상해 그렸다. /삽화 이찬욱

◆ ‘살아있는 미륵’으로 숭배 받은 설원랑(薛原郎)

소설가 김별아(50)에 의하면 설원랑(생몰연대 미상)은 “해사한 얼굴에 시와 그림에 능했던 예술적인 화랑”이었다. 또한 진흥왕 시절 신라 최초의 국선(國仙·화랑의 리더)이 된 사람이기도 하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흥왕이 애초에 두 여성을 원화(原花)로 삼아 무리 300~400명을 이끌게 했는데, 둘 사이에 시기와 질투가 심해 문제가 생기자 원화 제도를 폐지하였다. 몇 해 뒤 다시 풍월도(風月道·풍류도와 같은 의미)를 일으키고자 좋은 가문 출신의 남성으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이름을 ‘화랑’이라고 불렀다. 설원랑은 바로 이때 처음으로 국선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앞서의 기록보다 좀 더 흥미로운 방식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백성의 존경을 받던 신라의 한 승려가 “미륵(彌勒·미래에 출현하게 될 부처)의 형상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화랑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내놓는다. 그 승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꿈에 나타난 미륵과 꼭 닮은 청년을 영묘사(靈妙寺) 앞에서 만난다.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국선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미륵과 빼닮은 청년’이 바로 설원랑이다.

‘신라를 빛낸 인물들’에 따르면 화랑도가 창설되던 시기 신라사회에서 화랑은 ‘미륵불(彌勒佛)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장차 나라를 강성하게 하고,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할 유사 메시아(Messiah)로 본 것이다.

설원랑은 ‘살아 움직이는 미륵’으로 서라벌 주민들의 숭배를 받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잘생긴 얼굴에 설득력 있는 목소리. 여기에 인간과 자연을 노래하는 시를 쓰고, 아름다운 풍경까지 화폭에 담아내는 탁월한 예술적 능력.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이돌’ 수준의 대접을 받지 않았을까?

설원랑의 인기는 당시 왕의 인기와도 직결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의 신라사회는 “미륵은 전륜성왕(轉輪聖王·불법을 수호하는 이상적 군주)과 함께 나타나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린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흥왕=전륜성왕’ ‘설원랑=미륵’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종교사학자 유병덕의 논문 ‘풍류도(風流道)와 미륵사상(彌勒思想)’은 미륵과 화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병덕의 주장처럼 설원랑은 ‘화랑인 동시에 미륵’이었다.

“한국 종교의 시원은 풍류도에 있다. 그것은 무(巫)적 전통이 아닌 선(仙)적 전통이 강한 가운데 출현했다. 한국에서 미륵신앙이 대두해 국력을 흥하게 만든 역사는 통일신라의 경우가 처음이다. 삼국통일의 기세를 잡은 화랑도는 전래의 풍류도를 주체로 하여 그 당시 불교와 잘 조화된 가운데 통일을 성취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륵신앙도 화랑의 실천적 이념 역할을 했다.

이런 사조를 통해 완성된 인물을 불교 입장에서는 ‘미륵’이라 칭하고, 풍류도의 입장에선 ‘화랑’이라 칭하는 것이다.”

◆ 전설로 남은 ‘요절 화랑’ 사다함(斯多含)

요절(夭折)은 전설을 만든다. 록 뮤지션 짐 모리슨(28세 사망)이 그랬고, 영화배우 리버 피닉스(23세 사망)가 그랬으며, 소설가 김유정(29세 사망) 또한 그렇다. 이들의 삶은 짧지만 뜨거웠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그들은 일찍 죽어 영원히 살고 있다”고. 이 범주에 고민 없이 포함시킬 수 있는 화랑이 있으니 바로 사다함(생몰연대 미상)이다.

세상을 떠도는 ‘영웅 전설’의 형태로 남은 사다함의 일대기는 간명해서 눈물겹다. “세상에 이런 10대 소년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부른다. ‘삼국사기’에 실린 사다함의 소설 같은 생애를 요약해 아래 옮겨본다.

“신라의 진골이자 화랑인 사다함은 내밀왕의 7세손.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 풍채가 좋고 뜻과 기백이 높았다. 사람들의 청에 못 이겨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를 따르는 청년들이 족히 1천 명은 넘었다. 나이와 무관하게 그들 모두는 사다함을 흠모했다. 겨우 열다섯의 나이에 대가야와의 전쟁에 나가기를 왕에게 간청하니 왕은 ‘싸움터로 보내기엔 아직 어리다’며 말렸다. 하지만 사다함의 확고한 의지는 왕조차도 제지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하고 진실했다. 결국 참전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기에 왕이 노비로 쓸 수 있는 포로 300명과 적지 않은 땅을 주었는데, 노비는 자유롭게 풀어주고 땅은 극구 사양했다. 죽마고우 무관랑(武官郞)이 병사(病死)하자 ‘그와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세했으니, 나 혼자 살 수는 없다’며 일주일을 통곡하다 죽었다. 그때 사다함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역사학자 최광식은 그의 논문 ‘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개방성과 포용성을 지닌 풍류도를 중심 이념으로 익히고 닦은 화랑과 국선들은 신라의 주도세력이 되어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통일전쟁 이후에는 향가(鄕歌)를 짓는 등 격조 높은 모습도 보였다.”

사실 고문헌에 등장하는 화랑들의 무용담과 미담을 100퍼센트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그 에피소드들엔 ‘포상과 명성을 바라지 않고,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청년을 길러낼 시대적 필요성’이 개입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배층이 기록한 역사는 그렇게 서술·묘사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문노, 설원랑, 사다함 등 ‘화랑 트로이카’의 모습에선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여러 긍정적 가치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것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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