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유서를 씁니다. 궁정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나 승승장구하던 그는 스물일곱이 되었을 때 왼쪽 귀에 고음이 들리지 않기 시작하지요.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칩니다. 증세는 점점 심해집니다.

1802년 의사 권고로 하일리겐슈타트라는 조용한 시골로 내려가 6개월을 쉽니다. 도시를 떠났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유서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신이시여! 제게 단 하루만 온전히 깨끗한 귀를 허락해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절대 안 된다고요? 안됩니다. 그것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이 유서를 쓰고 난 후 남자는 다른 사람으로 변합니다. 대오각성(大悟覺醒). 죽음 문턱까지 다녀온 그는 남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가혹한 운명과 맞서 싸우겠노라 다짐합니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지요.

윙윙거리는 굉음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울려댑니다. 자기 귀에서 울리는 이 지독한 소음 때문에 세상 모든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도로 작품을 쓰기 시작합니다. 결국, 완전한 귀머거리로 쓴 곡이 9번 합창 교향곡입니다. 프리드리히 실러 시에 베토벤이 곡을 붙인 4악장의 장엄함. 이 4악장을 빛나게 하려고 1악장에서 3악장까지 빠른 전개로 기대를 한껏 끌어올립니다.

베토벤은 청력을 상실한 상태로 9번 합창 교향곡 초연 무대에 올라 지휘합니다. 현악 연주자들 활 놀림을 보며 곡 진행을 파악하려고 진땀을 흘립니다. 마지막 피날레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성악과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곡이 끝나는 지점을 파악 못 해 계속 손을 움직이지요. 알토 독창자 카롤리네 웅거가 베토벤 옷자락을 잡아끌며 청중 쪽으로 몸을 돌리게 했고 열광하는 사람들 모습을 보고 그제야 연주가 끝난 것을 알아차립니다.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쓴지 22년 세월이 흐르고 나서 일입니다. 베토벤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어떤 분은 해마다 12월이면 유서를 작성한다고 합니다. 신과 맺는 1년 동안의 인생 연장 계약서라고 표현하더군요. 대오각성, 이 네 글자 의미를 되새깁니다. 그럭저럭 살아온 지금까지 내 인생이라는 판을 뒤흔드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도끼질 같은 충격,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아픔.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죽음을 심각하게 고려하며 유서를 썼던 베토벤 심정 말입니다. 삶이 변하지 않고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이유는 대오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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