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보면 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600여 년간 청동기와 철기문화를 일으켰는데 이를 ‘야요이 문화’라고 한다. 오늘날 일본인의 조상은 원주민인 조몬(繩文)인을 몰아낸 이 야요이인이라는 학설도 있다. 이후 백제와 가야, 고구려인의 상당수가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이를 도래인(渡來人)이라고 한다. 일본의 건국과 일월숭배와 관련이 깊은 신화적 요소가 짙은 설화인 ‘연오랑 세오녀’도 삼국유사에 전한다. 이 설화가 고대 일본문화의 성립과 관련이 깊다는 것은 세오녀가 짠 비단의 존재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일본으로 건너간 집단 가운데 직조 기술자가 있으며, 이들이 일본에 직조 기술을 전파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듯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교류는 그 유래가 매우 깊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에 대해 일찍이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서’에 ‘그들의 습성은 강하고 사나우며, 무술에 정련하고 배타기에 익숙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게 되었으니, 그들을 만약 도리대로 잘 어루만져 주면 예절을 차려 받들고, 그렇지 않으면 문득 함부로 노략질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함께 교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신숙주는 임종 직전에도 성종에게 ‘일본과의 평화를 잃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임진왜란은 명, 청의 교체, 일본의 에도막부와 같은 새로운 정권의 성립을 말해 준다. 이 전란의 시대를 살던 강항(1567∼1618)은 왜군에 잡혀 피로인(被虜人)의 신세가 된다. 그가 지은 ‘간양록(看羊錄)’은 일본에 끌려가 목격한 실상을 속속들이 기록한 체험기록이다. 그 중 ‘적중봉소(賊中封疏)’의 한 대목을 보면 ‘백만의 야인이 수십만의 왜병을 대적치 못할 터인데, 국가에서 남쪽을 가볍게 여기고 북쪽을 무겁게 여기는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중략) 왜인이 포 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고 천성이 영리하여 지금의 왜인은 옛날의 왜인이 아니니, 조선의 방어 또한 옛날의 방어로는 안 되는 것이니, 국경의 방비를 전일보다 백배 더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일본의 역사와 사회상을 객관적으로 제시한 기록이다.

에도시대 조선통신사는 1607년에 시작되어 200년 동안 모두 열두 번 파견되었다. 통신사로 파견된 인사들 중 신유한(1681∼1752)이 쓴 ‘해유록(海遊錄)’의 기록을 보면, ‘통신사들은 일본 전국의 지식인과 민중에게 거의 열풍에 가까운 큰 환영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즉 조선 문화전파의 길이었다. 하지만 통신사들은 문화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일본 내부와 속사정을 자세하게 관찰하는 이가 드물었고, 일본의 참모습을 직시하기는커녕 깔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연암 박지원이 ‘우상전(虞裳傳)’에 남긴 언급을 보면, ‘수백 년 동안 사신의 행차가 내왕했으나 체통을 지키고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치중하느라 그 나라의 인물, 요새, 강약의 형세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왔다갔다만 하였다.’라는 기록이 당시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일본에 관한 종합 정보지의 성격을 지닌 이덕무(1741∼1793)의 ‘청령국지(<873B><86C9>國志)’를 보면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일본을 통해 서구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적지 않게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학에서는 한국과 일본은 모두 동쪽에 있는 나라라고 해서 목(木)으로 분류한다. 같은 목이지만 한국은 갑목이고, 일본은 을목이다. 이렇게 음양을 십성(十星)으로 분류하게 되면 겁재(劫財)가 되는데, 이 겁재는 사람으로 치면 배다른 형제이다. 즉 가까우면서도 먼 사이인 것이다.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한 일본과 불붙은 경제전쟁은 목소리만 높인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 아베의 숨은 목적은 한국에서의 극대화된 반일감정을 이용하여 그의 목표인 전쟁 가능한 일본 헌법으로 개정하는데 있다. 국민들에게 죽창과 의병의 행동강령, 이순신의 12척의 배를 운운하며 국민을 애국과 이적으로 가르는 것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반드시 이긴다.’는 손자병법이 필요한 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