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욱 시인
김현욱 시인

“뱀, 쥘 르나르, 너무 길다.” “섬,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반성, 함민복, 늘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씻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 “파랑새, 한하운,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지푸라기, 임보, 낟알을 다 뜯기고 만신창이로 들판에 버려진 지푸라기 그러나 새의 부리에 물리면 보금자리가 되고 농부의 손에 잡히면 새끼줄이 된다.”

서울 동도중학교는 전교생이 졸업할 때까지 시 100편을 외우는 전통이 있다. 일주일에 한 편씩이니 학년마다 33편 내외를 암송한다. 기사에 따르면, 동도중학교 전교생의 80% 정도가 시 100편을 외우고 졸업한다. 1999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14년째다. 시 암송 프로그램을 도입한 박찬두 국어 교사는, “수행평가 점수를 확정해야 하는 중간, 기말고사를 앞두고는 암송 확인을 받으려는 학생들의 줄서기가 교무실 앞부터 복도까지 길게 이어진다”고 말했다.

시 암송으로 유명한 나라는 독일과 프랑스다. 독일과 프랑스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 암송을 시킨다. 시 암송 노트가 따로 있다. 매주 시 한 편을 나눠주고 시를 외우게 한다. 독일과 프랑스는 고등학교 때까지 최소 100여 편의 시를 외워야 졸업을 할 수 있다. 독일과 프랑스의 국력은 모국어를 사랑하고 모국어의 정수를 획득한 문화 국민의 힘에서 나온다. 미국의 사립 명문학교, 중국의 사립 명문학교에서도 시 암송은 빠지지 않는 지도자 양성의 핵심 프로그램이다.

시암송국민운동본부 문길섭 대표는 시를 400편쯤 암송하는 시 암송 전도사다. 시 암송을 하면 좋은 점이 너무 많다고 한다. “친구나 애인처럼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고 뇌세포를 활성화해 치매를 예방하고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고 불면증을 사라지게 하고 자투리 시간을 소중한 시간으로 만들어주고 마음이 힘들 때 위로와 희망을 주고 글쓰기와 말하기의 수준을 높여주고 상상력과 창의력을 길러주고, 세상만물을 늘 가슴에 품게 해준다.”

2008년 죽장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시 암송을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 중에 한 가지는 시 암송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시 암송을 통해 특정 교과 성적을 향상하겠다는 얄팍한 계산은 참으로 어리석다. 시 암송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자신의 삶과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거룩한 행위였다. 마치 경전을 암송하는 구도자처럼 말이다. 아이들이 꼭 암송했으면 싶은 시가 몇 편 있는데 그중에 정현종 시인의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도 그중 한 편이다.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정현종,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 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시 암송을 학급에서 실천하려던 어떤 교사는 일부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려야 했다. 이유인즉슨, 안 그래도 외워야 할 게 너무 많은데 아이에게 또 다른 부담을 준다는 것이다. 암기는 하면 할수록 질린다. 시험 끝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갖다 버리는 문제집 같은 것이다. 암송은 하면 할수록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이의 영혼에 인류 대대로 전해 내려온 언어와 문화의 에센스가 그득 차오른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 열정을 가진 교사가 아이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꽃을 옮긴다.

교사로 근무하면서 아이들과 시 암송을 하고 매일 아침 글기지개를 쓰고, 매주 주제를 정해 시를 쓰고, 그림책을 읽어주고, 시 암송 축제를 열 수 있었던 에너지는 ‘그저 그러는 게 좋아서!’였다. 서울 동도중 학생들은 시 암송 수행평가 때문에 당장은 애를 먹겠지만 훗날 시 암송 덕분에 웃는 날이 분명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