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최근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와의 이야기에서 뭔가 달라진 것을 발견했다.

“딸, 휴대폰 좀 그만하시지.” “아빠, 그럴 수 있어.” “따님, 조금 일찍 일어나시는 게 어떨까요?” “아버님, 그럴 수 있습니다.” “딸, 책 좀 읽으실까요?” “아빠, 그럴 수 있어요.”

이상했다. 예전 같으면 필자가 묻는 것에 대해 분명한 말투로 이유를 말했을 텐데 최근에는 너무 짧았다. 그리고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했다. 필자는 호기심이 생겼다. 딸아이의 대화법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그런지? 그래서 관찰을 해 보기로 했다. 관찰 결과 아이는 많은 상황에서 같은 말 패턴을 사용하고 있었다.

필자는 왜 그런 말을 쓰는지 물었다.

“유행이야. 그것도 몰랐어?” “혹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니?” “……!” 아이는 생각을 했다. 기다려 주었다. 필자도 ‘그럴 수 있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조금 막연했다. 아이의 생각도 길어졌다.

필자는 길어지는 만큼 아이의 생각이 깊어지기를 바랐다. 독자 여러분은 “그럴 수 있어.”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시간이 지나도 명확한 의미가 떠오르지 않았다. 필자는 검색을 해보았다. 검색 능력이 떨어지는 필자인지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가 필자를 보고 있었다. 아이가 “아빠,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다 겨우 하나 찾았다.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 사람을 보는 인식, 사람의 행위를 읽어내는 지혜를 기르게 한다.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넉넉한 긍정’이라 할 수 있다.” (박인기 ‘그럴 수도 있지!’중에서)

“인간성에 대한 넉넉한 긍정”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과연 아이는 이 정도의 의미까지 생각했을까? 한동안 생각을 하던 아이가 친구와 약속이 있다면서 급하게 일어섰다. “무슨 뜻인지 알았어?” 아이가 “아빠, 그럴 수 있어. 놀다올게.”라고 말하며 바람보다 더 빠르게 문 밖을 나섰다.

그런 아이를 항해 필자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이번 주 라디오 사연에는 중복되는 내용이 많았다. 그것은 방학을 앞둔 학부모들의 사연이었다. 저마다 걱정들이 한 가득이었다. 방학 동안 세 끼를 어떻게 차려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사연에서부터 매일 전쟁을 치를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는 내용까지 소재만 다를 뿐 방학을 걱정하는 마음은 같았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필자는 “그럴 수 있어.”를 되뇌었다.

과연 전쟁 같은 방학은 누굴 위한 것일까? 학생? 학부모? 교사? 그것도 아니면 다른 누구? 필자가 보기엔 학생과 학부모들을 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학생과 학부모 둘 다 방학 스트레스가 엄청 심하니까! 그럼 교사는? 교사들은 최소한 학생과 학부모가 느끼는 정도의 스트레스는 없으니까 나름 방학의 수혜자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교육계에서 참 바뀌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방학이다. 방학을 잘 보내는 이론적인 방법들은 많다.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는 가정은 얼마나 될까? 맞벌이가 보편화 되어 있는 우리나라 가정에서는 더더군다나 이론적인 방학 생활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맞벌이 학부모들은 사교육에 의존한다. 아니면 될 수 있으면 많이 학교에서 실시하는 방학 중 방과 후 수업에 아이를 보낸다. 그러니 방학 중 제일 바쁜 곳은 사교육 현장일 수밖에 없다.

서로를 이해는 공감 능력을 기르는 방학,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갈등 공감 능력과 갈등 조정 능력을 기르는 방학이 되자고 하고 싶지만, 대한민국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인지 너무도 잘 알기에 차마 말을 할 수가 없다. 차선책으로 “그럴 수 있어(요)!”라는 말을 상황에 맞게 써볼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 방학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나마 덜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