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경북의 멋과 맛을 찾아서
조선에서 치즈가 사라진 이유는?

조선 초기에도 치즈는 있었다. 오히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사라진다. 우유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초기에도 치즈는 있었다. 오히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사라진다. 우유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 우유’는 뒤죽박죽이다. 도무지 정확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두 편의 글로 ‘뒤죽박죽 우유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저 용주 조경(1586~1669년)의 ‘용주유고 제1권 칠언절구’의 내용이다.

양공 집의 행락(杏酪)은 우유보다 맛있는데/옥그릇에 담아 오니 눈처럼 하얗구나/만약 신선이 대약(大藥)을 만든다고 하면/향긋한 이것 두고 무엇을 다시 구하랴

‘행락(杏酪)’은 ‘은행나무(열매)+우유 성분’이다. 은행나무 열매와 우유를 넣고 끓인 죽쯤으로 짐작한다. 우유, 은행의 비율? 어떻게? 정확지 않다. ‘대약(大藥)’은 신선이 만들 법한, 대단한 효력의 약을 의미한다. 불로장생약이나 숨 넣어가는 환자를 살리는 약쯤으로 짐작한다.

행락은 신선이 대약을 만들 때 사용할 법한 재료보다 더 좋은 것이다. 행락의 비교 대상은 우유다. 행락이 우유보다 더 맛있다 했다. 거꾸로 우유가 대단한 식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경은 16세기 후반인 선조 조에 태어나서 현종 조 때 죽었다. 조선 중기가 지나며 후기를 시작할 때다. 이때도 우유는 귀했다. ‘낙(락, 酪)’을 한정하지 않고 ‘우유 성분쯤’이라고 ‘짐작’하는 이유가 있다. 유암 홍만선(1643∼1715년)의 ‘산림경제’ 중 한 구절이다.

우유가 낙(酪)이 되고, 낙이 소(酥)가 되고, 소가 제호(醍醐)가 되니, 제호는 소(酥)의 정액(精液)이다. (증류본초)

 

치즈, 버터 등은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음식이다.
치즈, 버터 등은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음식이다.

우유는 연유, 분유, 요구르트, 버터, 치즈 등으로 변화한다. 건조 과정을 거칠 때도 있고, 발효, 숙성 과정을 거칠 때도 있다. 냉장, 냉동이 시원치 않았을 때는 장기 보관을 위하여 건조하거나 끓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 기록에서는 이 모든 ‘유제품’에 대한 구분이 명확지 않다. 낙, 소, 제호가 모두 불분명하다. 조선 상황에 맞춘, 조선의 창의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중국 ‘증류본초(證類本草)’가 원본이다. ‘증류본초’의 내용을 그대로 따왔다. ‘증류본초’는 중국 송나라 휘종 때 편찬한 책이다. 11세기 말. ‘산림경제’보다 약 600년 전의 내용이다. 60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우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중국 책을 고스란히 옮기고 있다. 한반도의 ‘우유 연구’가 있었다면 600년 전 중국 ‘증류본초’을 어렵게 인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이렇게 우유에 대해서 시큰둥하고, 별다른 연구,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을까? 다산 정약용의 ‘다산시문집_제13권_서(序)’에 그 대답이 있다. 제목은 ‘금성방략 서(金城方略序) 내각에서 교지에 응하여 지음’이다. 정조가 방책을 물으니, 궁중의 관계부처에서 대답을 올린다는 뜻이다. 내용은 ‘대 북방 군사전략’이다.

(전략) 대체로 둔전법(屯田法)이란 군량 수송을 줄이고 집을 지키면서, 도로에 오래도록 있음으로써 적이 저절로 지치게 하는 방책이다. (중략) 손무(孫武)가 말하기를, “적에게서 양식을 얻으면 군량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하였는데, 이는 중국으로써 중국을 공격하는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저 오랑캐들의 성질은 살육을 농사로 삼고 있으므로, 날마다 목축에 적합한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이주하면서 우유, 양유 같은 것이나 먹고 살며 창고에 저축해 놓은 곡식이 없으니, 싸워서 그들을 이기더라도 내 근심거리를 제거하는 데에 지나지 않고 그들의 양식을 빼앗아 이용할 수는 없다. 양식이 떨어지면 멀리 실어날라야 하고, 실어나르는 길이 멀면 군사는 주리고 백성은 고달파서, 오랑캐가 기회를 타서 침략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이 오랑캐에 누차 패하게 된 까닭이요, 둔전의 법이 생기게 된 까닭이다. (후략)

 

타락죽이다.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타락죽이다.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한반도 북방에는 유목, 기마민족들이 산다. 끊임없이 국경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군사 정벌이 필요하다. 문제는 병참이다. 손자는 “적에게서 양식을 얻으면 군량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했지만, 주식(主食)이 같을 경우나 가능하다. 중국 내의 전쟁에서 가능한 이야기다. 북방민족의 주식은 고기와 우유, 양유 등이다. 정벌은 쉽지만, 이들의 본거지를 점령하더라도 양식은 얻을 수 없다. 먹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리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 결국, 농사지으며 머문다. 둔전이다.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은 우유를 그리 편하게 여기지 못했다. 양은 자라지 않으니 양유는 불가능하다. 쇠고기는 금육(禁肉)이다. 소는 농사의 필수품이다. 사사로운 도축은 엄하게 금했다. 소가 귀하니 우유도 구하기 힘들었다. 젖소가 없던 시절이다. 우유는 송아지를 낳은 어미 소의 젖을 통해서 구했다. 송아지의 입을 막고 젖을 못 먹게 한 다음, 어미 소의 젖을 빼앗았다. 차마 할 짓이 아니다.

우유에 쌀 혹은 찹쌀을 넣고 끓인 것이 타락죽이다. 귀하게 여겼다. 궁중에서도 한정적으로 사용했다. 비교적 살림살이가 좋았던 영조 시절에도 타락죽은 귀하게 여겼다.

영조 29년(1753년) 7월9일의 ‘조선왕조실록’ 기사다. 제목은 ‘은여결, 타락죽, 통영의 일을 하문하다’이다.

(전략) 또, 하문하기를, “(중략) 낙우(酪牛)가 비록 짐승이기는 하나 예전부터 봄갈이를 위하여 봉진(封進)을 멈추었으므로 낙우가 이토록 많지 않았는데, 이제 책자(冊子)를 보니 열여덟 마리나 되어 그 송아지를 아울러 서른여섯 마리이다. (중략) 이제 다섯 주발의 타락죽을 위하여 열여덟 마리의 송아지가 젖을 굶게 하는 것은 인정(仁政)이 아니다. (중략) 그 소는 내의원으로 하여금 수를 줄이게 하여, (후략)”

선정을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니다. 영조는 젖 짜는 소, 낙우(酪牛)의 숫자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젖 짜는 소가 열여덟 마리면 젖 굶는 송아지도 열여덟 마리다. 모두 36두의 소가 고통을 겪는다. 낙우는 농사에 동원하지 못한다. 민폐다. 고작 다섯 그릇의 타락죽을 위하여 서른여섯 마리의 소를 고통스럽게 하고 민폐를 끼칠 일은 아니다. 어진 정치, 인정(仁政)이 아니다.

우유 문화 역시 몽골의 고려 침략 시기에 한반도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음식 문화는 쉬 바뀌지 않는다. 곡식이 주식인 민족이 어느 순간 고기, 우유를 주식으로 삼기는 힘들다. 몽골의 원나라가 우유, 양유를 먹더라도 고려인들이 주식으로 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날 치즈로 유추하는 수유(酥油)와 수유치[酥油赤]는, 몽골 침략기와 가까운 조선 초기 기록에 나타나고 곧 사라진다. 조선 중기, 후기로 가면서 타락죽은 남지만, 우유의 핵심 생산물인 치즈는 오히려 사라진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년(1421년) 11월 28일의 기록에 ‘치즈는 왜 사라졌는가?’에 대한 설명이 남아 있다. 제목는 ‘군역의 회피 수단인 수유치를 폐지하다’이다.

 

타락죽. 조선 시대에는 궁궐에서도 타락죽을 귀하게 여겼다.
타락죽. 조선 시대에는 궁궐에서도 타락죽을 귀하게 여겼다.

수유치(酥油赤)을 폐지하였다. 황해도, 평안도에 수유치가 있는데, 스스로 달단(韃靼)의 유종(遺種)이라 하면서 도재(屠宰)로써 직업을 삼고 있었다. 매 호(戶)에 해마다 수유(酥油) 한 정(丁)을 사옹방(司饔房)에 바치고는 집에 부역(賦役)이 없으니, 군역(軍役)을 피하는 사람이 많이 가서 의지하였다. 그러나, 수유는 실로 얻기 어려우므로, (중략) 국가에 들어오는 것은 얼마 안 되는데도 주현(州縣)의 폐해(弊害)가 되는 것은 실제로 많았다. 서흥군(瑞興郡)에 한 호(戶)에 건장한 남자가 21명이 있으면서 부역(賦役)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태상왕이 병조에 명하여 각도의 수유치(酥油赤)의 호수(戶數)를 두루 살펴서, 있는 곳의 고을에서 군역(軍役)에 충당(充當)하게 하니, 참의 윤회가 아뢰기를, “수유는 어용(御用)의 약(藥)에 소용되며, 또 때때로 늙어 병든 여러 신하들에게도 내리기도 하니, 이를 폐지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상왕은 말하기를, “그대의 알 바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드디어 이를 다 폐지하니, 모두 수백 호(戶)나 되었다.

조선의 치즈는 왜 사라졌는가? 치즈 만드는 일이 힘들었다. 전문 기술자가 아니다. 상당수는 병역을 피해서 숨어든 조선의 장정이다. 비 전문가가 치즈 만들기는 힘들다. 짐승의 고기, 우유 등 부산물을 이용하여 음식을 만들거나 먹는 것은 농경민족화 된 조선 사람들에게 여전히 어색했다.

병역제도가 어그러진다. 태종은 살아 있으면서 왕권을 아들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병권과 외교 문제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쥐고 있었다. 문관 출신이지만 군사에도 밝았다. 아들 세종이 문약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힘든 일은 자신이 짊어졌다. 태종은 국가의 정상적인 부역, 군역을 위해 수유치를 폐지했다.

치즈를 ‘불요불급한 것’으로 여겼다. 참의 윤회의 말도 정당하다. “치즈는 임금이 드시는 약에도 필요하고 병든 노대신들에게 선물로 내려 주는 것으로도 요긴하다”고 하지만 태종은 단칼에 자른다. 태종의 수유, 수유치 폐지는 정확했다. 이후, 조선의 어느 임금도 치즈를 먹거나 수유치 제도를 부활시키지 않았다. 타락죽은 있지만, 치즈, 수유는 없다. 치즈가 우유의 정수라면 타락죽은 ‘곡물+우유’다. 타락죽은 16세기 초반 탁청정 김유(1491∼1555년)의 ‘수운잡방’에도 나타난다. 16세기 초중반에 이미 경북 안동, 예안에서도 타락죽은 만들고 먹었다. 대중적이었다. 치즈는 없다. 우유를 깊이 알지 못한 이유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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