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피장봉호(避獐逢虎)라는 옛말이 있다. 직역하면 ‘노루 피하려다가 범 만난다’가 되고, 의역으로는 ‘작은 해를 피하려다 도리어 큰 화를 당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정도가 될 것이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나라 안팎이 단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다. 날만 새면 한 건씩 일이 터진다. 도무지 쓸만한 외교전략 하나 안 보이는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처절한 ‘동네북’ 신세다.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넘어서 오면초가(五面楚歌)라는 신조어마저 나돈다. 일본은 무역보복의 칼끝을 도무지 거둘 기미가 없다. 오랫동안 기획한 것으로 보이는 이번 사변(事變)은 아무래도 적지 않은 피해를 감수해야 매듭을 드러낼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미국이 중국과 무역 공방을 지속하는 모습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면서 여파를 짐작하지 못한 업보가 너무나 깊다. 정부가 스스로 ‘위안부 협상’을 파기하고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같은 변수를 가볍게 본 것은 결코 작은 허물이 아니다. 일본은 무역 문제를 정치수단으로 철저하게 활용하고 있는 트럼프를 따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보면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르고 있는 해코지를 트럼프에게 말려달라고 부탁하면 되리라고 믿은 안일한 판단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일본은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우리보다 열배 백배 공을 더 들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찰떡궁합을 나타내온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망각해서는 안 될 일 아니던가.

며칠 사이 많은 일이 더 발생하고 있다. 북한은 신형 잠수함 개발에 성공했다고 떠벌리더니, 동해안으로 신형 탄도탄 미사일을 두 발이나 쏴댔다. 러시아전투기가 독도 하늘 우리 영공에 두 차례나 침범해 우리 공군기의 수백 발 경고 사격을 받았는데도 러시아는 “넘어간 적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우리 전투기의 사격을 놓고 일본은 “(독도 상공은) 일본 영공인데 한국전투기가 왜 사격을 하느냐”고 얄밉기 짝이 없는 참섭을 내놨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은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대응이다. 국방부는 최현수 대변인이 읽은 입장 자료에서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일본 측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독도는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 영토”라고 강조했다. 그게 다였다. 아니, 이 나라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국방부가 탄도미사일을 쏴대는 북한이나 전투기로 영공을 침범한 러시아·중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얄미운 논평을 내놓은 일본만 물어뜯는 게 말이 되나? 어느새 우리의 적은 오직 일본뿐이고, 북한과 러시아·중국은 아름다운 우방이 되었나. 트럼프 대통령이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들이 WTO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돼 무역 혜택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고 USTR(미 무역대표부)에 지시했다. 중국을 겨냥한 조치라지만, 우리나라도 유탄을 맞을 가능성이 있는 변화여서 허투루 보아넘길 일이 아니다. 북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딱총 놀이쯤으로 여기는 트럼프의 야멸찬 언행이 분노를 부른다. ‘동맹국’인 우리가 북한의 핵 인질이 돼가고 있는 비극을 트럼프는 도대체 무슨 감상으로 관망하고 있나. 국가 안위를 온통 트럼프의 ‘힘’과 김정은의 ‘배려’에 맡겨놓고 사는 이 나라 국민의 삶이 새삼 애달프다.

일련의 사태 발생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도, 외교력을 포함한 성숙한 해법도 오리무중이다. 문 대통령은 물론, 국방부 장관조차도 러시아 전투기의 영공 침범이나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해서 꿀 먹은 벙어리 놀음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어떤 처지인가. 북한이라는 ‘늑대’ 한 마리 잘 다루면 끝날 줄 알고 내부 분열상만 드러내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미국·러시아·일본·중국 그렇게 네 마리 ‘호랑이들’의 먹잇감이 되어버린 토끼 같은 처량한 몰골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