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여행을 간 곳에는 멋진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효석 정본 작업

이상옥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지난 2012년 5월께로 이효석 전집을 재출간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면서이다. 전집을 처음 출간하는 것도 아니고 재출간하는 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은, 원문과 이본 등을 비교하고 교정하여 원문에 가장 가까운 정본(定本)을 출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검토한 내용을 가지고 매주 만나 토론하여 텍스트를 확정하는 이 지난한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은 채정 선생님, 그리고 대학원 동료 두 명,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 팀이 최종적으로 팀을 이끌게 되었다. 이상옥 선생님은 70대에 뵈었는데 이제 80대가 되었다. 그리고 20대의 풋풋했던 친구는 30대가 되었고, 나도 지금은 40대가 되었다.

우리 팀은 연령층이 다양하고 성장 지역도 각양각색었다. 연령층과 성장지가 다르다는 것은 이 작업을 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인간을 닮아서 나이와 출신지를 갖는다. 30대에게 생소한 단어가 50대에겐 무척 익숙한 언어일 때가 있고, 서울 사람이 모르는 말을 강원도 사람은 일상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 작업을 통해 이러한 낯섦과 낯익음의 격차를 줄이고, 한자나 영어, 아주 곤란할 때는 각주를 덧대어 말을 곧추세웠다. 때로는 손을 대지 않으면 안 되는 오식과 비문을 바로잡았다.

이 작업을 하면서 기억나는 건 ‘말결’이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다. 두고 볼수록 예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결’은 ‘무늬’라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겨를’(때, 사이, 짬)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무늬라고 했으나 기실은 ‘조직이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라고 해야 분명하다.) 무늬라는 뜻의 ‘결’과 사이라는 뜻의 ‘겨를’의 줄임말인 ‘결’은 음은 같지만 그 뜻은 현저히 다른데, 이를 동음이의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결’이 ‘잠’이나 ‘물’과 같은 명사와 결합하면, 동음이의어적 성격이 헐거워져 ‘무늬’와 ‘겨를’의 경계가 모호해지게 된다. 예컨대 물결은 물의 무늬이면서 물의 흐름과 흐름의 사이이다. 잠결은 ‘잠을 자는 사이’이기도 하겠지만, 잠과 잠 아닌 것 사이의 일렁임이다. 그리고 말결은 말의 사이이자 말의 무늬다. 이렇게 보니 ‘무늬’와 ‘겨를’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닌 것도 같다. ‘사이’의 흐름, ‘사이’의 이어짐이 ‘무늬’이니 말이다.

이효석 정본 작업은 이렇게 우리말을 더 풍성하게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2012년 가을께 ‘메밀꽃 필 무렵’의 4교를 끝냈는데 2년이 지나 다시 열어봤더니 여전히 문제가 되는 부분이 많아 몇 번의 작업을 더 거쳐야 했다. 그렇게 해서 2016년에 ‘이효석 전집’ 전 6권을 상재했다. 이 작업을 통해서 기존의 오류와 실수를 바로잡았다. 그 과정은 한글 프로그램의 ‘검토’와 ‘메모’ 기능을 활용하여 기록하였다. 품이 많이 들지만 그 빛은 미약할지 모른다.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일들과 꼭 필요한 일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이 일을 하게 되어 즐거웠고,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계속 즐거울 것이고, 그리하여 오래도록 즐거울 것을 생각하니 벌써 뻐근하다. 갈비뼈 하나 쯤 떼어낸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이상옥 선생님

이 작업을 하면서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상옥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기왕이면 정본 전집을 출간하고 싶어 하셨고, 이효석문학재단 측에서 이러한 선생님의 뜻에 선뜻 동의해주었기에 이 일은 가능했다. 우리는 이 작업을 ‘정본 작업’으로, 우리 스스로를 ‘정본 팀’이라고 불렀다. 매주 두세 번 정도 모여 작업을 진행했는데, 이상옥 선생님은 지각이나 결석을 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다. 선생님은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시는 동안에도 강의 시간에 늦은 적이 없었다고 하셨다. 이런 분이라면 으레 당신과 같지 않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선생님은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나를 책망하기보다는 격려하고 이해해주셨다.

선생님은 정본 작업에 단지 참여만 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를 해오셨고, 원문의 어려운 한자는 물론 활자가 흐릿하여 어린 나조차 알아보기 힘든 글자까지를 읽어내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의 견해를 고집하는 법이 없으셨고, 우리가 내놓는 의견을 귀담아 들으셨다. 선생님은 아침 10시부터 때로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이 지난한 작업을 하면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으셨고, 팀에 활기를 불어넣으셨다.

정본 작업을 하는 동안 선생님은 재단 측으로부터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으셨다. 심지어 전집에 편자나 감수라는 명목으로 당신의 이름을 올릴 법한데 그렇게 하지도 않으셨다. 어떤 영광도, 명예도, 이익도 없이 선생님은 정본 작업에 열정을 쏟으셨고, 그 일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으셨다.

선생님은, 나이로 치자면 우리보다 서른 살 이상 더 많으시고, 고작 박사학위를 막 받았거나 박사수료생인 우리와는 격이 다른 위치임에도 모든 팀원들을 동등하게 존중해주셨다. 선생님의 지식은 넓고 깊어 이야기는 끊어지는 법이 없었고, 마르는 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듣는 법을 잊지 않으셨고, 토론을 포기하는 법이 없으셨다. 심지어 나와는 정치적 견해도 달랐지만, 선생님은 설익은 내 말을 들어주셨고, 내 생각을 존중해주셨다. 지금도 그러하시다.

나는 평생 이처럼 고고(高高)하며, 학학(鶴鶴)한 분을 뵌 적이 없다. 나는 원체 막돼먹어 누군가를 존경할 줄도 모르고 나 잘난 맛에 살아왔다. 이상옥 선생님은 그런 내게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게 해주셨다. 이상옥 선생님에 대한 이러한 마음은 비단 나의 사견만은 아닐 것이다. 정본 출판을 마무리한 이후에도 여전히 자주 연락을 주고받으며 매년 서너 번의 모임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 우리 정본 팀 역시 이상옥 선생님의 성결에 감화된 듯하다.

올해 5월, 우리 정본 팀은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3박 4일간의 짧은 여행이었다. 내내 비가 오긴 했지만, 덥지도 않아서 좋았다. 이 여행을 선생님은 일종의 시험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함께 여행을 오래 할 수 있는 ‘족속’인지 서로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아무래도 이 시험에 통과하게 된듯하다. 이제 오랫동안 함께 가고자 했었던 영국으로 여행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상옥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없고, 선생님은 나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하신 적도 없다. 선생님은 내게 그저 당신의 행동만으로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셨다. 이러한 선생님을 더 자주, 더 오래 뵐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