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미 중의 별미 ‘배추’, 선물로 주기도

밭에서 ‘속’을 채우고 있는 배추.

‘금제옥회’보다 맛있는 배추

서울 토박이 친구 눈이 동그래졌다. “뭐? 너희들은 배추도 전 부쳐 먹니?”

못 볼 꼴을 봤다는 표정이었다. “배추전이 얼마나 맛있는데!”라고 생각했지만 혼자 생각이었다. 옹기종기 모였던 대여섯 명 중 누구도 ‘배추전’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먹기는커녕 본 적도 없었다. 배추전?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는 표정이었다.

흔하면 홀대한다. 배추가 꼭 그러하다. 주변에서 쉽게 본다. 가격도 높지 않다.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조금만 가격이 오르면 ‘금배추’라고 부르며 야단이다. 농가에서 기르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나라 어디서나 쉽게 기르고 먹는다. 특용작물이라야 귀하게 여긴다. 배추는 어디서나, 누구나 기르고, 먹는다.

한 포기를 가르면 열 장, 스무 장의 배추전을 부칠 수 있다. 흔하고 싸다. 치명적인 단점이다. 오랫동안 “배추전은 먹을 것 귀하던 경북 산골에서 궁여지책으로 먹었던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제사를 모실 때 반드시 배추전이 상에 올랐던 것도 까맣게 잊었다. 하기야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음식이 가장 귀하다는 사실도, 미련하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알았으니.

 

결구 배추의 속 고갱이. 결구 배추의 역사는 100년 남짓이다.
결구 배추의 속 고갱이. 결구 배추의 역사는 100년 남짓이다.

하찮은 배추를 선물로 주다?

사가정 서거정(1420~1488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모셨고 숱한 문집, 시를 남겼다. 벼슬도 만만치 않았다. 형조판서, 좌찬성을 지냈다.

서거정의 ‘사가시집_제40권’에 ‘배추 선물’이 나온다. 선물을 보낸 이는 생원(生員) 안유문이다. 사가정은 배추를 선물 받은 후, 이 시를 남겼다. 제목은 ‘안유문(安有文)이 배추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이다.

가을이 되면 배추(菘, 숭) 또한 좋고 말고/좋은 맛이 고량진미와 맞먹는걸/옥삼갱(玉糝羹)을 어찌 자랑할 것 있으랴/금제회도 괜히 맛볼 것 없다마다/국을 끓이면 참으로 입에 딱 맞고/안주로 먹으면 배도 채울 만하네/고기를 먹는 건 내 일이 아니라서/향기로운 채소를 잊을 수가 없다네

시에 등장하는 ‘옥삼갱’은 소동파가 별미로 쳤던 토란국이다. 중국에도 감자, 고구마 등이 전래되기 전이다. 토란, 마 등으로 끓인 국을 최고로 쳤다. 옥삼갱이다. ‘금제회’ ‘금제옥회’는 귤 등을 썰어서 버무린 잘게 썬 회다. 국화잎으로 무쳐서 노란빛이 난다고도 한다. 잘 만진 생선회다. 별미로 치는 음식이었다. 배추가 이런 별미, 옥삼갱이나 금제옥회보다 낫다는 내용이다.

사가정은 배추로 국을 끓이고 술안주로도 만들었다. 우리는 술안주, 밥반찬을 혼동하고 있다. 550년 전의 사가정은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었다. 배춧국도 맛있고, 배추로 만든 안주도 좋고 배를 채울 만하다고 했다.

사가정의 시절에는 배추를 귀하게 여겼다. 사가정과 이 시에 등장하는 안유문은 사돈지간이다. 사가정의 아들 충의위 서복경과 안유문의 맏딸이 혼인했다.

가까운 사이지만 사가정은 높은 벼슬아치다. 사돈이자 고위직 벼슬아치에게 준 선물이 배추다. 그 배추를 받아들고 조선 전기 최고의 문인이 시를 남겼다. 배추는 귀한 선물이었다.

배추는 ‘숭(菘)’이다. ‘숭’은 ‘숭채(菘菜)’의 줄임말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그의 시에서 ‘납조냉면숭저벽(拉條冷麪菘菹碧)’이라고 했다. ‘숭저(菘菹)’는 배추김치다.

배추는 백채에서 비롯되었음이 정설이다. 백채(白菜)는 줄기 부분이 흰색이라서 붙인 이름이다. 다산 정약용이 시에서 “배추김치가 푸르다(숭저벽, 菘菹碧)”고 한 것은 다산 시대의 배추가 지금의 배추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결구 배추는 속 고갱이가 노랗다. 줄기는 흰 부분이 많다. 당시의 배추는 비 결구 배추, 즉 얼갈이배추다. 흰 부분, 노란 부분도 있지만 적다. 결구 배추의 역사는 길지 않다. 불과 100년 정도다. 일제강점기에도 결구 배추, 반 결구 배추가 있었지만 널리 유행하지는 않았다. 한국전쟁 후 속이 꽉 찬, 노란색의 결구 배추가 널리 퍼졌다.

배추는 ‘숭(菘)’ ‘백숭(白菘)’ ‘백채(白菜)’ ‘숭채(菘菜)’ 등으로 표기했다. 민간에서는 글자의 의미를 모른 채, 소리 나는 대로 ‘배초’라고 불렀다. ‘백채’ ‘배초’가 널리 퍼지니 ‘배초’를 한자 표기로 ‘배초(拜草)’로도 적었다. 다산 정약용은 “숭채는 방언으로 배초라고 하는데, 이것은 백채의 와전임을 (우리나라 사람들이)모른다”고 했다(다산시문집). ‘拜草(배초)’는 뜻이 없는 이두식 표현이다. 배추 이름은 ‘숭’ ‘숭채’와 백채, 두 가지로 진행되었다. 지금은 숭, 숭채는 사라지고 백채의 변형인 배추만 남은 셈이다.

김치와 김장의 역사는 배추의 진화와 관련이 깊다. 오늘날 김치 문화는 배추의 발달로 가능해졌다.
김치와 김장의 역사는 배추의 진화와 관련이 깊다. 오늘날 김치 문화는 배추의 발달로 가능해졌다.

‘백채’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배추도 중국에서 전래 되었다. 중국에는 오래전부터, “‘이른 봄 부추, 늦가을 배추(早韭晩菘, 조구만숭)’가 가장 맛있다”는 표현이 있었다. 남제의 문혜태자(文惠太子, 458∼493년)가 주옹(5세기∼493년)에게 묻는다. “채식 중에 어떤 나물의 맛이 가장 좋더냐?” 주옹이 답한다. “초봄의 이른 부추 나물과 늦가을의 늦배추였습니다.(春初早韭 秋末晩菘, 춘초조구, 추말만숭)”이라고 했던 데서 시작된 표현이다.(南史, 남사_권34_周顒列傳, 주옹열전)

한반도에서는 조선 시대부터 배추가 자주 나타난다. 고려말부터 배추 이야기가 시작되니 배추 역시 몽골의 원나라가 고려를 침공했을 때 전래한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의 ‘앞선 배추’를 받아들인다.

중종 28년(1533년) 2월6일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이다. 내용은 중국과 밀무역을 했던 이들이 자수하면서 진술한 것이다. 범인은 사노(私奴) 오십근과 청로대(淸路隊) 유천년이다. 공범(?)이지만 신분은 전혀 다르다. 사노는 관청이 아닌 민간의 노비다. 청로대는 국왕 거동 시, 호종(扈從)하는 군인이다. 이들은 자신들도 속았다고 진술한다.

“주범은 용산의 관노(官奴) 이산송이다. 우리는 그의 거짓말에 속아서 사기그릇을 싣고 중국으로 가서 쌀, 콩, 조 등과 더불어 배추 씨앗(白菜種, 백채종) 등을 밀무역했다. ‘제주도로 간다’라는 이산송의 말을 믿고 가보니 중국이었다”

중국에서 사들인 밀무역 품목에 배추 씨앗이 있다. 16세기 중반에도 배추를 백채(白菜)라고 표현했다.

한반도 김장, 김치의 역사는 배추의 진화 역사다. 100년 전에는 결구 배추가 없었다. 결구 배추는 품종 개량을 통하여 얻은 것이다. 우리가 먹는 배추김치와 100년 전의 배추김치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배추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그나마, 중국 배추가 우리보다 나았다.

장다리는 배추 혹은 무의 꽃이다. 장다리꽃이 피는 배추는 오늘날의 얼갈이배추 같은 것이다. 푸른빛이다. 속이 차지 않는 불 결구 배추다. 노랗게 속이 찬 결구 배추는 중국 북부지방이 원산지로 쉽게 꽃이 피지 않는다. 중국 동북부 랴오둥(遼東, 요동)지방은 북경, 심양을 오가는 통로다. 랴오둥을 통하여 중국과 교류했던 조선의 관리, 문인들은 배추에 대해서 많은 기록을 남겼다. 주로 중국 배추가 좋다고 부러워하는 내용이다. 조공 무역 등 국가 간의 공식무역이 아니라 사신단, 역관 등을 통하여 이루어진 사무역을 통해 배추 씨앗은 한반도로 흘러들어왔다.

오늘날에는 배추가 다양해졌다. 색깔이 다른 배추도 흔하다.
오늘날에는 배추가 다양해졌다. 색깔이 다른 배추도 흔하다.

1832~1833년, 대 중국 사신단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김경선(1788~1853년)은 “(중국)배추는 한 포기에 수십 개의 잎사귀가 붙어 있어 우리나라 것보다 크기가 배는 되며, 살이 무척 연하다. 겨울에 지하실에 두었다가 먹으면 언제나 새로 뽑은 거와 같다”라고 적었다(연원직지). 재미있는 것은 ‘지하실’이다. 원문에는 “겨울에는 ‘지실’에 저장한다(冬月儲於地室, 동월저어지실)”라고 했다. 건물의 지하실보다는 땅을 파고 깊이 묻어두었다는 뜻이다. 50년 전에는 우리나라 시골에서도 ‘움’을 이용했다. 땅을 적절한 깊이로 파서 움을 만든 다음, 그 안에 배추, 무 등을 보관했다. 김경선이 중국에 갔던 19세기 중반에는, 중국인들도 땅을 파고 움처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움으로 겨울철 채소를 보관하는 것은, 중국이 우리보다 빠르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배추는 오래전부터 환금작물 노릇도 했다.

‘악학궤범’을 편찬했던 용재 성현(1439~1504년)의 ‘용재총화(1525년, 중종 20년 간행)’에서는 조선 초, 중기 채소 재배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그중 ‘왕십리 배추’가 등장한다.

“(전략) 무릇 채소와 과실은 알맞은 흙에 따라서 모두 심어야 그 이익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동대문 밖 왕십리는 무, 순무, 배추 따위를 심고 있으며, 청파(靑坡), 노원(蘆原) 두 역(驛)은 토란이 잘 되고, 남산의 남쪽 이태원 사람들은 다료(茶蓼)를 잘 심어 홍아(紅芽)를 만들고, 경기 삭령(朔寧) 사람들은 파를 잘 심고,(후략)” (용재총화_제7권)

비슷한 시기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 25년, 1530년 편찬)’에도 “왕십리평(往十里坪)은 흥인문 밖 5리쯤에 있는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무와 배추 등 채소를 심어 생활한다”라고 했다. 배추는 제법 짭짤한 환금작물이었다. 18세기의 실학자 유수원(1694~1755년)은 “왕십리에서 채소를 키우는 이들은 도성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도 채소를 판다. 시골 사람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각자 자기 본업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우서). 이미 ‘농산물 재배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맛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