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종택 종부가 차려낸 다과상.
학봉종택 종부가 차려낸 다과상.

경북도 23개 시·군과 대구엔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관광지, 특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과 즐길거리, 맛봐야 할 요리와 특색 있는 음식점이 가득하다. 본지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기획연재 ‘경북을 하다’를 통해 기자와 맛칼럼니스트가 직접 체험하고 맛본 대구·경북의 ‘숨겨진 보물들’을 소개한다.

‘종택 체험’ 100배 즐기기

안동의 모든 종택과 고택이 관광객을 위해 대문을 열고 내부를 공개하는 건 아니다. 종택에서의 숙박도 마찬가지. 집 자체가 문화재급 기념물인 경우가 많기에 훼손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란 것이 개방하지 않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의 사생활 침해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 자칫 사람들의 실수로 종택의 유물이 파손될 경우 이를 보수·복원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형편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안동의 종손들이 자신의 집이 민박으로 사용되는 걸 저어하는 상황이 충분히 이해된다. 종택은 수백 년의 역사가 축적된 귀한 곳이다. 그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잘 경우엔 보통의 숙박업소에서 머무를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아래 몇 가지를 소개한다.

▲젊은 층이 종택에서의 숙박을 결정할 때 가장 먼저 묻는 게 있다. “내부에 화장실과 샤워시설이 있나요?” 답을 말하자면 각각의 종택마다 다르다. 농암종택 긍구당엔 방 안쪽에 폭 1.5m 정도의 조그만 화장실이 있다. 샤워도 가능하다. 하지만, 화장실과 샤워장이 외부에 있는 종택이라도 걱정할 건 없다. 대부분 현대식 시설로 개조해 말끔하게 관리되고 있기에 크게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의 추억을 불러일으켜 재미를 느꼈다는 관광객도 있다.

▲건물 앞에 출입을 자제해달라는 표지판이 세워진 경우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종택에서의 예의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살림살이 공간인 안채는 함부로 출입하지 않는 게 ‘점잖은 손님’으로 대접받는 노하우.

▲종택과 고택은 단순히 돈 때문에 숙박객을 받지는 않는다. 종손과 종부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는 언행을 하지 않아야함은 당연하다. 여기에 비싸지 않은 조그만 선물 하나쯤 마련해 종부에게 슬쩍 건네는 센스를 발휘한다면, 아침 밥상의 반찬이 보다 화려해질 수도 있다. 종택을 지키는 이들도, 찾는 이들도 ‘주고받는 정’을 아는 똑같은 사람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자신이 묵을 종택이나 고택에 관련된 자료를 미리 읽어둔다면 안동에서의 여행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농암종택 사랑채 앞 장독대가 정겹다.
농암종택 사랑채 앞 장독대가 정겹다.

농암종택 별당 ‘긍구당’서 특별한 하룻밤을…

풀벌레와 이름 모를 새의 울음만이 조용히 흐르는 강물 소리에 섞여 적요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 가득한 도시에서는 결코 경험하지 못할 농밀한 암청색 어둠. “진짜 밤은 검지 않고 푸르다”고 노래한 기형도의 시(詩)가 떠올랐다. 16세기 조선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한 농암종택(聾巖宗宅)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시내에서 30분만 차를 몰면 일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 속을 달리게 된다는 사실이 일생 번잡한 곳에서만 살아온 기자에겐 낯설고 생경했다.

안동시 외곽에 자리한 농암종택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현보(1467~1555)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연산군 앞에서도 ‘바른 소리’를 할 만큼 호방담대 했고, ‘어부가’와 ‘효빈가’ 등의 시조도 썼다. 안동부사와 성주목사로 봉직할 때는 청렴함을 인정받았고, 탁월한 문장으로 자연을 노래한 문인으로도 이름 높았다.

종택을 지키는 이성원 종손은 잘 마른 수건 두 장을 긍구당(肯構堂) 마루에 놓아두고 일찍 잠을 청했나 보다. 예부터 집을 찾은 손님을 맞는 별당으로 사용된 긍구당은 경북유형문화재 제32호다. 문화재에서 잠드는 드문 체험에 마음이 설렜다. 깨끗하게 정돈된 보송보송한 침구를 보니 이곳이 손님을 귀하게 모시던 반가(班家)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밝아온 다음날 아침. 종택과 분강서원, 강각, 예일당, 명농당, 농암사당까지를 천천히 돌아봤다. 옮겨와 복원한 건물들임에도 고풍스런 분위기와 드러나는 미적 감각은 만들어진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종택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깎아 세운 것 같은 청량산 적벽이 밀려온 새벽안개와 조화를 이뤄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했다. 농암이 정2품 벼슬인 ‘지중추부사’를 마다하고 고향에 머무르고자 한 이유가 짐작되는 순간이었다.

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종손·종부와 마주했다. 그들은 종가와 종손으로서의 삶을 조용조용 들려줬다. 두 사람 모두 표정이 더없이 온화했다. 바로 그때다. 농암종택 사랑채 기와에서 부서지는 햇살에 놀란 까치 한 마리가 청옥빛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전화: 054-843-1202 홈페이지: http://www.nongam.com
 

학봉의 유물이 보관된 운장각.
학봉의 유물이 보관된 운장각.

‘불천위’ 모신 학봉종택엔 보물지정 문화재만 500여점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의 15대 종손 김종길 씨 목소리는 겸손과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학봉을 포함한 선조들의 행적을 들려주던 종손은 “날이 밝으면 운장각과 사당의 불천위(不遷位)를 꼭 보라”고 조언했다.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위치한 학봉종택(鶴峯宗宅)은 들어서는 입구부터가 여타 고택과 달랐다.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와 나무, 거기에 기묘한 형상의 수석까지 즐비한 정원이 방문객을 사로잡는다. 안채와 사랑채, 별채와 사당, 학봉기념관과 유물전시관인 운장각까지 어디를 돌아봐도 먼지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권력 앞에 굴종치 않는 태도를 견지했기에 ‘조정의 호랑이’로 불렸던 학봉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한 탓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파직됐다. 이후 명예 회복을 허락한 왕의 명령으로 관군을 독려하고, 의병을 규합하는 경상도 초유사의 역할을 수행하다 전쟁 중 숨졌다. 학봉의 13대 종손인 김용한 씨는 파락호(破落戶)로 자신을 위장하면서까지 만주 독립군에게 거금을 보내는 용기를 보여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

기자가 묵었던 풍뢰헌(風雷軒)은 학봉종택의 별채다. 초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음에도 바람이 자유롭게 오가는 한옥 특유의 구조 때문인지 새벽엔 이불을 덮어야 할 정도로 잠자리는 시원하고 쾌적했다. 종부가 차려준 다과상에 오른 다식은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예뻤다.

묵직한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 운장각엔 학봉의 친필 원고인 ‘경연일기’ ‘해사록’을 비롯해 ‘고려사절요’ ‘사기’ 등의 오래된 책과 왕의 명령서인 교서, 민화, 벼루 등의 유물이 가득했다. “이 건물 안에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503점이 있다”는 게 김종길 종손의 설명.

학봉종택 사당에선 난생처음 불천위를 눈앞에서 확인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웠거나, 학문과 인격 모두에서 유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의 위패인 불천위는 영원히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모셔 후손들이 제사 지내게 된다.

학봉종택 불천위 제사에서 사용한다는 울향(蔚香). 그 내음이 아직 셔츠 깃에 남아있는 듯하다.

전화: 054-852-2087 홈페이지: http://www.hakbong.co.kr
 

임청각.
임청각.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대표가 추천하는 ‘안동의 고택’ 임청각·의성 김씨 종택·수졸당·지례예술촌

종택을 포함한 문화재 보호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온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대표는 꼭 방문해야 할 안동의 고택으로 임청각, 의성 김씨 종택, 수졸당, 지례예술촌(지촌종택) 등을 꼽았다.

임청각은 문재인 대통령 방문 이후 더욱 유명해졌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인 이곳은 ‘독립운동의 산실’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일제강점기 철도 부설로 철거된 건물의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다. 지척엔 ‘법흥사지 칠층전탑’과 탑동종택이 자리했다. 탑동종택은 현재는 개방하지 않고 있다.

의성 김씨 종택이 자리한 임하면 내앞마을은 의성 김씨들의 집성촌. 격변하는 세월 속에서도 500년을 꿋꿋이 자리를 지킨 의성 김씨 종택 역시 지금은 보수 중이다. 내앞마을에선 중요민속문화재 제267호인 귀봉종택과 독립운동가 김대락이 건축한 ‘백하구려(白下舊廬)’도 만날 수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도 내앞마을에 위치했다.

학봉의 15대 종손 김종길씨(오른쪽).
학봉의 15대 종손 김종길씨(오른쪽).

퇴계의 셋째 손자 동암 이영도의 종택인 수졸당은 종부가 만드는 건진국수 맛으로 유명하다. 처마 밑에서 시래기가 말라가는 풍경이 정겨웠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생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로 회자되는 지례예술촌엔 지촌 김방걸의 종택이 있다. 임하호의 푸른 물빛과 고택의 예스러움이 어우러진 풍광이 기가 막힌다.

도산면 퇴계종택은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 34칸 한옥인 지금의 건물은 퇴계 이황의 13대 후손인 이충호가 1929년 새로 지은 것이다. 종택 우측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 있다. 차로 5분 거리엔 도산서원이 자리했다. 서원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건립됐다.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연구했던 도산서당 영역과 그의 덕행을 기리는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뉜다.

임하호가 내려다보이는 지례예술촌.
임하호가 내려다보이는 지례예술촌.

서후면 경당종택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장계향의 친정이다. 지난해 장성진 종손와 권순 종부가 공중파 다큐멘터리에 소개되면서 종가의 음식을 맛보려는 손님들이 부쩍 늘었다. 팔순의 종부가 가져다준 식혜 한 잔이 더위를 시원스레 날려줬다.

안동 여행에 나섰다면 풍천면 하회마을도 빼놓을 수 없다.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은 보물 제414호. 제자와 자손들이 서애의 유덕을 기려 지었다. 대문에 붙은 ‘國泰民安(국태민안)’의 서체가 미려했다. ‘하회마을의 양심적인 부자’로 존경받은 북촌댁의 정식 당호는 화경당. 석류나무, 모과나무, 탱자나무가 사이좋게 늘어선 정원이 인상적이다. 현재는 화재 위험 등으로 개방하지 않고 있기에 숙박은 불가능하다.

수졸당.
수졸당.

이외에도 하회마을엔 양오당, 염행당, 양진당, 하동고택, 작천고택 등이 자리하고 있다. 서애가 ‘징비록(懲毖錄)’을 쓴 옥연정사도 하회마을에 있다. 마을 입구에서 비포장길을 10여 분 달리면 서애와 그의 아들 류진을 배향한 병산서원이 나타난다.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풍경이 아름답다.

이밖에도 안동엔 미처 소개하지 못한 종택과 고택이 적지 않다. 관련된 정보가 궁금하다면 안동시청이 운영하는 문화관광 홈페이지(http://www.tourandong.com/main.htm)가 도움이 될 것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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