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승자는 1952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나 고려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79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활동을 했다.

‘이 시대의 사랑’(1981), ‘즐거운 일기’(1984), ‘기억의 집’(1989) 등의 시집을 발표했고 이 시집들은 모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녀는 많은 시인들에게 영감과 영향을 주었다. 진은영 시인은 언젠가 최승자를 ‘우리들의 시인’이라고 칭한 바 있다(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시인의 말’ 중).

그녀는 1994년 국제작가회의(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참가하였다. 주최 측에서는 참가자의 시 열 편 정도의 영어 번역시를 요구했다. 최승자는 첫 시집 중 번역하기 쉬운 시들을 우선 번역했는데 그것이 열 편이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두 번째 시집을 번역했고,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세 번째 시집을, 다시 네 번째 시집을 번역했다.

결국 마흔네 편의 시를 번역했다.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쓰고 있다.

“생각해보라, 올 여름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완전히 발가벗다시피 한 채 머리가 뜨끈뜨끈해져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어 30분에 한 번씩 샤워를 하면서 번역을 했는데, 그밖에 달리 무슨 일을 또 할 수가 있겠는가.”(최승자, ‘어떤 나무들은―아이오와 일기’, 세계사, 1995, 12~13면) 그리고 이렇게 번역된 시에서 다시 17편의 시를 골라냈다.

그녀가 고른 시들은 하나 같이 자신을 학대하며, 자기모멸적이고 위악적이며, 비속한 언어를 거침없이 쏟아내는, 아리고 쓰린 시들이다. 이 시들을 시집별로 정리하면 ‘이 시대의 사랑’에서 네 작품, ‘즐거운 일기’에서 가장 많은 시가 뽑혔는데 여덟 작품이다.

그리고 ‘기억의 집’에서 세 작품, ‘내 무덤, 푸르고’에서 두 작품을 골랐다. 시가 ‘4→8→3→2’의 순서로 줄어들고 있다.

피학, 가학, 위악, 자기모멸, 비관, 절망, 허무가 최승자의 본령이라면 시집이 상재될수록 그러한 것들의 강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새로운 것들은 낡기 마련이며, 모든 강렬한 것들은 식기 마련이다. 최승자 역시 스스로 이런 사실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1993년에 출간된 ‘내 무덤, 푸르고’의 자서에 이런 위기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시집을 엮으면서 다시 읽어보자니, 이 시들이 너무도 뒤늦고 뒤처진, 그리고 너무도 낡고 늙은 시들이라는 느낌이 든다. 뒤늦게, 뒤처져 길 떠나는 이 낡고 늙은 시들이 제 힘으로 제 갈 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는지 걱정스럽다.”

열 편으로 충분한 데도 마흔네 편이나 번역했던 것은, 더 강렬한 시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더운 여름을 자신의 시를 번역하면서 견뎌냈던 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은 자신의 시를 찾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아이오와를 다녀온 후 최승자는 번역도 못하고 시도 못 쓰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 “언제부터인가 노장(老莊)·명리학·사상의학·점성술 등과 같은 신비주의 공부에 빠졌던 겁니다.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의 세계가 아닌, 현상을 뛰어넘는 세계로 좇아갔어요. 답이 있을 듯하면서 손에는 답을 쥐기 어려운 공부였어요. 그 공부에 빠지면서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최보식이 만난 사람: 정신분열증…. 11년 만에 시집을 낸 시인 최승자’, 조선일보, 2010.11.22.)라고 말했다. 언제부턴가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고, 서울의 친척집에 머물던 그녀는 1999년부터 고시원과 여관방을 떠돈다. 최승자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어느 해에는 여섯 달쯤 잠을 못 잤어요.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했고. 잠을 못 자면 소주를 마시고 쓰러져 잤는데, 나중에 심해지면서 술을 마시는 것조차 생각나지 않았어요. 정신이 휑했지요.”

최승자는 시에 매달려 살아갔다. 시가 “밥벌이를 할 수도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배고파 울 때에 같이 운다든가, 다른 사람들이 울지 않을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울어 버릴 수 있다는 것뿐이다.”(‘이 시대의 사랑’, 뒷면의 글)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시와 더불어 살았다.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하여 그 캐릭터와 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듯 최승자는 어느 순간부터 시를 쓰지 못하고 자신의 시속에 매몰되어 자신의 시처럼 살게 된다. 자신의 시처럼 비관적이고, 자신의 시처럼 혹독한 그런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다. 시인이 시가 되어버릴 때 시인의 생은 끝나고, 시인은 시인이 아니라 전설이 된다.

이미 그녀가 알고 있었듯 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시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길 바랐다.

‘내 무덤, 푸르고’의 시집 뒤편에 “시 혹은 시 쓰기에 대해 이제까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도 믿지도 않았지만, 이제 비로소 나는 바라고, 믿고 싶다. 시 혹은 시 쓰기가 내 마음을 병석에서 일으켜 세워줄 것을”이라고 썼다.

그녀는 한편으로 시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시가 자신을 일으켜 세우길 바랐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말처럼 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게 될 때 그것은 시일 수 없다. 오랜 세월을 떠돌았던 최승자는 다시 아무것도 아닌 시에게로 돌아와 있다. 이제 안도해도 좋다, 그럴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나는 지금 최승자의 시집들을 늘어놓고 그녀의 자서들을 읽고 있다. 그녀의 자서는 하나같이 짧아서 채 백 글자를 넘지 않는다. 이 짧은 자서에는, 글이 아니라 시로만 말하려고 했던 그녀의 의지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이제 나는 시를 읽는 대신 ‘이 시대의 사랑’을 펴놓고 시어들을 만지고 있다. 나의 지문이 시집 위를 지나갈 때 글자를 느낄 수 있다.

그 글자들 덕분에 내 지문의 위치를 알게 되고 이런 지문을 가진 나를 실감하게 된다. 지문을 가진 나와 나를 휘감고 있는 대기와 빛과 소리, 그런 세계를 느낄 수 있다. 언젠가 나의 언어로 이 세계의 삶고, 이 세계에 없는 이들을 만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