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고딕건축 최고의 걸작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2019년 4월 15일 오후 6시 50분.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사실이라고 믿기 힘든,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참사가 벌어졌다. 화마가 덮쳐 천년의 역사를 일순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을 따져보겠지만 이미 불타버린 역사는 영영 돌이킬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노트르담 대성당의 옛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인류가 고이 간직해온 가치라는 것이 영속은커녕 일순간 먼지로 사라져 버릴 수 있음을, 그러니 겸손해야 한다는 뼈저린 교훈을 세계인들에게 생생히 보여주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중세의 고딕건축의 백미로 손꼽히는 걸작 중에 걸작이다. 사람의 손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거의 천 년 전에 말이다. ‘노트르담’(notre-dame)이라는 이름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여인’(our Lady)이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킨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파리의 대성당이 어떤 미술사적 의미를 지녔기에 그토록 많은 세계인들을 유혹해 왔던 것일까?

천년의 중세에서 처음으로 유럽 전 지역에 널리 나타난 미술양식은 로마네스크이다. 대략 1000년경에 시작되어 200여 년 유행했던 양식인데 고대 로마를 닮았다하여 ‘로마네스크’라는 이름이 붙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은 그 외형이 육중해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벽체가 두텁고 장식이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웅장함과 함께 소박한 느낌을 준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어 나타난 것이 고딕(gothic)양식이다.

‘고딕’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트족’ 다시 말해 야만족들의 미술양식이라는 뜻으로 폄하하기 위해 붙여진 명칭이다. 로마네스크 다음에 등장한 미술 양식을 이처럼 불렀던 이들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사람들이다. 르네상스 인들은 고대의 예술 정신을 되살린 자신들의 미술에 고귀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바로 이전 수백 년 동안 유행했던 미술양식을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그런데 르네상스가 만들어 놓은 이 용어는 결코 정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고딕 양식은 고트족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었으며, 야만적인 양식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2019년 4월 15일 화재로 불타버린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AFP
2019년 4월 15일 화재로 불타버린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AFP

고딕은 12세기 초반에서부터 15세기까지 400년 이상 유럽 각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중세를 대표하는 미술양식이다. 고딕은 1120년 경 파리를 중심으로 한 일 드 프랑스(Ile-de-France) 지역에서 발달했다. 특히나 1135년 경 개축된 파리 북부에 위치한 생-드니 대성당의 주보랑은 고딕 양식의 발생지로 미술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참고로 생-드니 대성당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무덤으로 사용하던 교회이다. 12세기 초 고딕양식으로 대성당들이 지어지기 시작했고, 반세기 동안의 건축적 실험을 거쳐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지어질 1163년 무렵에는 완성도 높은 건축이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1345년 93m에 달하는 대성당이 완성되었을 때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높이감은 분명 중세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마치 신의 세계가 땅위에 펼쳐지는 듯한, 곧 종말이 도래할 것이고 높이 솟은 신의 집에서 자신들은 구원을 받으리라는 확신으로 감격의 순간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신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던 욕망은 비단 고딕양식으로 대성당을 쌓아 올렸던 중세 사람들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고딕에 앞선 로마네스크 양식 역시 그 높이와 웅장함에서 결코 고딕에 뒤지지 않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대표하는 독일의 슈파이어 대성당이 좋은 예이다. 슈파이어 대성당은 몇 차례의 개축을 거쳐 1106년에 완공이 되었는데, 가장 높은 첨탑의 높이가 자그마치 71m에 달한다. 1345년 완공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높이가 93m이니 건축물의 높이가 20m 자라나는데 무려 240여 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독일의 한적한 마을 슈파이어에 우뚝 솟은 대성당을 짓기 위해 건축가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벽면을 투텁게 하고 육중한 기둥을 촘촘히 세우는 것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듯 보인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대성당들이 무겁고 투박한 외형을 지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고딕 시대에 접어들면서 건축 기술의 혁신이 일어났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엄청난 무게를 효율적으로 분산시키는 방법을 알아내어, 더 이상 두터운 벽면 없이도 역학적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지은 건축가들 역시 고딕의 새로운 건축술을 사용하였는데, 대성당의 외벽을 한 바퀴만 돌아 제단 쪽으로 향하기만 하면 그 증거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가 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제단이 위치한 동쪽 외벽을 비롯해 남쪽과 북쪽 외벽 상단부를 유심히 관찰해 보면, 갈비뼈처럼 돌출되어 무지개다리처럼 건물 아래로 이어진 건축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한 두 개가 아니라 대성당 외벽 전체를 두르며 나타난다. 이를 가리켜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라고 부르는데, 우리말로는 ‘공중부벽’으로 번역될 수 있다. 부벽이라는 것은 흔히 벽면에 일정한 넓이를 가지고 돌출되어 수직으로 뻗어 있는 부분을 가리키는데, 벽을 보강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부벽은 로마네스크양식의 건축물에도 보편적으로 사용이 되었다. 그런데 이 부벽이 고딕양식으로 넘어 오자 더욱 발달하게 되면서 플라잉 버트레스라는 구조가 나오게 된 것이다.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천장과 벽면 구조를 외벽으로부터 돌출되어 아래로 흘러내리는 공중부벽과의 관계 지어 생각해 본다면 어떻게 고딕 건축가들이 두터운 벽면과 육중한 기둥 없이 하늘로 솟아 오른 엄청난 높이의 대성당을 지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대성당의 천장은 움푹 폐인 궁륭(Vault)으로 이루어져 있다. 궁륭은 세 개의 늑재(rib)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늑재들이 벽면으로 연장되어 얇고 작은 기둥다발을 이루어 벽면을 타고 아래로 내려온다. 천정을 올려다보면 늑재들이 서로 그물처럼 단단히 얽혀 있으면서 하중을 아래로 고루 분산 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그 하중들이 외벽에 연결되어 있는 공중부벽을 타고 다시 한 번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앱스 외벽에 돌출된 공중부벽.   /Archinect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앱스 외벽에 돌출된 공중부벽. /Archinect

이처럼 건축의 각 부분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위에서 내려오는 힘을 건물 전체에 고루 분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고딕 대성당은 높이를 지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건축구조가 하중을 충분히 처리하면서 또 다른 이점이 생겼다. 벽면이 더 이상 두터울 필요가 없어졌다. 아예 벽면 전체를 없애 버리고 그 자리에 ‘색유리그림창’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게 된다. 돌로 막혀 있던 벽면에 넓은 창이 생겼고 자연광이 창의 색채를 입고 교회 안을 형형색색 채워주니 전에 없던 환상적인 공간이 연출되었다. 이렇게 고딕의 빛의 미학은 건축적 혁신으로부터 덤으로 선물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고딕건축의 형식적 특징은 수직 상승성이다. 하늘로 오르려는 듯 대칭되어 나타나는 정문 위 두 개의 탑들과 빈틈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들이 대성당의 외벽을 장식하고 있다. 둥근 아치보다는 끝이 날카로운 아치들이 수직으로 대성당을 장식하고 있어 시각적으로 무게감이 사라지고 위로 솟구치려는 인상을 남긴다.

화재로 인해 지붕이 내려앉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언젠가 복원되어 다시 우리를 맞이하겠지만 더이상 중세 고딕의 건축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모습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못내 아쉽지만 이 또한 예술의 운명이 아닐런지. 우리가 생의 무게와 세월을 견디듯 예술작품들도 그러하다는 사실에 조금의 위안을 얻는다.

/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