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위에 상왕(上王)이 있다는 줄도 모르고…
임금 위에 상왕(上王)이 있다는 줄도 모르고…
  • 등록일 2019.07.15 19:53
  • 게재일 2019.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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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준의 장기에 가면 조선왕조 500년이 보인다
4. 대역죄로 몰린 대사헌 홍여방(洪汝方)

1. 길등재 표지석. 길등재는 영일현에서 장기현으로 연결되던 고갯길이다. 현재는 말끔히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지만 조선시대 이 길은 220여 명의 유배객들이 저마다 사연을 짊어지고 넘었던 고갯길이었다.

홍여방의 장기현 유배가 결정된 날이 1420년 4월 26일이었으니, 여기 도착한 날짜는 아마 그해 5월 초순경이었을 것이다.

대사헌은 사헌부의 수장(首長)으로 종2품이다. 지금으로 치면 검찰총장 격이다. 역할로 본다면 수사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재의 검찰보다는 훨씬 권력이 막강했고, 간여하는 범위도 넓었다. 우선 정사를 토론하고 모든 벼슬아치를 규찰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현재의 감사원의 기능이다. 또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며 협잡행위를 단속하는 업무도 사헌부의 일이었다.

사헌부 관리는 대관(臺官)이라고 한다. 길에서 대관을 보면 왕족이든 대신(大臣)이든 먼저 피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위세는 대단했다. 이들은 국왕에 맞서 탄핵하고 간쟁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다른 관원의 모범이 돼야 했고, 요직이었기에 명망 있는 자들이 천거되었다.

이런 사헌부의 최고 책임자인 홍여방(洪汝方)이 장기에 온 것이니 얼마나 떠들썩했겠나. 그냥 온 게 아니라 충의위(忠義衛)의 적을 삭제당하고 대사헌 직첩도 뺏긴 채였다. 충의위란 1418년(세종 즉위년)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의 3공신 자손들이 주로 소속되도록 만들어진 특수층에 대한 일종의 우대 기관이었다. 그 좋은 신분까지 삭탈당하고 먼 극변지역인 장기까지 유배온 것으로 봐서는 중앙에서 무슨 큰 일이 있긴 있었나보다. 도대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여기까지 왔을까.

1418년 8월, 태종은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던 장남 양녕대군의 세자자격을 박탈하고 경기도 광주로 물러나 살게 했다. 대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그리고 얼마 뒤 자신은 왕위에서 물러나고 충녕대군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줬는데, 이렇게 즉위한 임금이 그 유명한 세종이다.

하지만 세종은 즉위한 이후에도 한동안 아버지 태종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태종이 물러난 임금, 즉 상왕(上王)이 되었음에도 군사권과 국가 대사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애초에 태종이 일찌감치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유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아들 세종이 마음껏 꿈을 펼쳐 나갈 수 있도록 지지기반과 주변 환경들을 다져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강상인의 옥사가 일어났다. 병조참판이었으나 태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사실상 병조의 수장행세를 했던 강상인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태종이 분명 군사권은 자신이 맡는다고 선언했었으나 강상인은 태종을 무시하고 세종에게 군무(軍務)를 보고하고 일을 처리했다. 태종은 이를 지켜보다 그를 괘씸한 놈이라며 국문을 한 뒤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이 급작스럽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지나간 후, 태종은 개국공신 심덕부의 아들이자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이 마음에 걸렸다. 고심 끝에 강상인의 사건을 다시 꺼내들었다. 강상인과 심온을 억지로 연루시킨 것이다. 심온이 영의정 신분으로 명나라 사은사로 떠날 때 요란했던 전별식이 빌미가 되었다. 강상인을 국문하면서 그의 입에서 ‘심온’이란 두 글자가 나오도록 고문을 했고, 고문에 의한 자백을 근거로 강상인은 역모죄로 몰려 이번에는 사지가 찢겨지는 형벌에 처해졌다. 일단 처리된 사건은 다시 다루지 않는다는 법의 일반원칙인 ‘일사부재리 원칙(一事不再理原則)’도 그때는 통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영문도 모르고 명나라에서 돌아온 심온은 역모죄의 주범으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었다. 강상인, 심온 등과 친한 이관 등 여러 관리들이 참형에 처해졌고, 그 일족들은 처형되거나 연좌제에 걸려 변방으로 유배를 갔다. 부인과 딸들이 관노가 된 것도 부지기수다.

태종이 이런 일을 저지른 이유는 간단했다. 왕의 외척과 공신들이 권력을 농단하는 일이 없도록 주변세력들을 미리 제거해준 것이다. 덕분에 세종은 손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성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공신세력과 외척세력들이 제거되었음에도 태종은 상왕의 신분으로 4년간 줄곧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며 국정을 감독했다. 그러면서 틈나는 대로 강원도 철원으로 나가 사냥을 즐겼다. 철원은 일찍부터 태종이 강무장(講武場)으로 자주 이용했던 곳이다. 강무장이란 임금이 사냥을 하거나 군대를 훈련시키던 무예 연마장을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세종 두 왕이 모두 21회에 걸쳐 97일간 철원 고석정(孤石亭) 일대에서 강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태종은 아들 세종뿐 아니라 때로는 손자인 문종을 대동하고 자주 이곳을 방문하였고, 강무를 마치고는 위로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2.청송 찬경루. 1428년(세종 10년) 청송부사 하담이 경치가 빼어난 용전천 절벽 위에 지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지었다고 한다. 찬경루 기문은 당시 경상도 관찰사인 홍여방이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를 기리며 썼다.
2.청송 찬경루. 1428년(세종 10년) 청송부사 하담이 경치가 빼어난 용전천 절벽 위에 지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지었다고 한다. 찬경루 기문은 당시 경상도 관찰사인 홍여방이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를 기리며 썼다.

사건은 태종이 상왕으로 있던 1420년 4월에 일어났다. 모내기 철에 가뭄이 극심하여 농심마저 타들어가고 있었다. 하필 이때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철원으로 강무를 겸해서 나들이를 가겠다는 것이었다. 말이 나들이이지 임금보다 더 높은 상왕의 행차이므로 당연히 이를 호위하는 군사들과 시종들이 따라야 했다. 뿐만 아니라 강무에 필요한 철원평야 일대의 전답과 농민들이 동원되어야하는 성가신 행사였다.

이때 정사를 토론하고 벼슬아치를 규찰하는 기능을 갖고 있던 사헌부 수장 홍여방이 나섰다. 그는 장령 송인산(宋仁山)·지평 허척(許倜)·집의 박서생(朴瑞生)·장령 정연(鄭淵) 등의 관리들을 모아 놓고 ‘상왕이 지금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가뭄에 군사들과 시종들을 데리고 나들이 나선다’며 그 대책을 논의했다. 그리고 병조의 영사(兵曹令史) 안유인(安有仁)이란 자를 직접 불러서 상왕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동향을 파악하라고 했다.

홍여방은 조사를 마친 뒤, 허척을 시켜 임금(세종)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 상왕의 행차를 금지시키라고 했다. 사태를 파악한 세종은 태종에게 신하들의 의견이 이러하니 행동을 자제해 주는 게 좋겠다는 취지의 부탁을 하게 된다. 세종으로부터 사실상 ‘강무를 금지하라’ 는 명령을 들은 태종은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대노했다. 태종은 ‘그런 일이 있으면 엄연히 내 아들(세종)이나 대신, 또는 병조에 알려 나에게 전달하게 할 것이지, 상왕인 나를 마치 일반 신하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죄를 규탄하는 것처럼 절차를 취하며 임금에게 그런 행위를 못하게 하도록 재촉까지 한단 말인가’라며 길길이 뛰었다.

태종도 강무 나들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뭄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들판에는 아직 파종도 하지 않아 농작물 피해도 없었으며, 마침 최근에 적은 비도 내렸다. 모든 응접 절차에는 농민들을 배제시켰기 때문에 그들에게 번거로운 폐가 없을 뿐더러, 군사는 단지 백 명을 거느리고 갈 작정이었다. 곡식이 없는 빈 땅에 3∼4일간 가서 사냥이나 즐기다 오려고 했던 것인데, 대신들이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대사헌이란 자가 자신의 허락 없이 병조의 관리들을 불러다 동태까지 조사를 했다는 데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를 임금에게까지 고자질하여 문제를 삼으려는 행동까지 취했으니 상왕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났다고 생각했다.

이 무렵 태종은 공신세력과 외척세력에 대해서는 심하게 알레르기를 갖고 있던 시기였다. 더군다나 병권에 대해서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털끝만큼도 허용하지 않을 시점에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격이었다. 화가 단단히 난 태종은 자신의 거둥을 제지한 신하들을 국문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결국 홍여방·송인산·허척·박서생과 정연 등은 모두 의금부 감옥에 하옥되었다. 의금부에서는 홍여방 등이 직접 병조의 서리를 불러 기탄없이 상왕의 거동을 취조하듯 물었으니, 신하가 임금을 공경하는 예절에 벗어나는 것이고, 또 상왕을 시위하는 군사들에 대해 운운하는 것은 그 마음에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라며 추달을 한 후, 이들 모두에게 대역죄를 적용했다.

1420년 4월 26일 의금부에서는 홍여방을 경상도 장기현으로, 서생은 상주로, 송인산은 익산으로, 정연은 진산으로, 허척은 영천으로 각각 귀양을 보냈다. 이런 처분이 있었음에도 사간원에서는 이들에게 더 큰 처벌을 해야 한다는 상소가 이어진다.

홍여방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이 남양(南陽)이다. 그는 수양대군의 며느리인 인수대비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판서를 지낸 홍길민(洪吉旻)이다. 홍길민은 이성계를 추대하며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책훈된 개국공신이다.

태종은 개국공신 집안인 홍여방을 홧김에 먼 바닷가 장기까지 내쫓고 나니 한편으로는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병조참의로 있으면서 왕에게 직언을 잘 하던 원숙(元肅)을 불러 ‘홍여방이 개국공신의 아들인데도 공신적(功臣籍)을 삭제당하고 멀리 귀양 가 있으니 노모가 아들을 무척 보고 싶어 한다. 진실로 불쌍한 일이다’ 며 세종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세종은 상왕의 내심을 읽고 1420년 9월 5일 선지(宣旨)를 내렸다. 이 조치에 따라 홍여방은 그해 9월 중순경에 장기에서 경기도 장단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422년 4월 10일 풀려난다. 그때 충의위(忠義衛)에 환속되고 직첩도 돌려받게 된다. 유배기간 중에도 그는 연주정(戀主亭)을 지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표시하기도 했다.

 

3.장기 옛길. 장기에서 길등재를 넘어 오천과 대송을 지나 경주로 넘나들었던 옛길이다.
3.장기 옛길. 장기에서 길등재를 넘어 오천과 대송을 지나 경주로 넘나들었던 옛길이다.

직첩을 돌려받고 얼마 후 그는 한성부윤이 되었다. 2년 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다시 한 번 장기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시와 술을 좋아하며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나 직언을 잘하였다고 한다.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에 언양(彦陽)을 노래한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언양현조에 실려 있다. 또 청송을 순시할 때 찬경루(讚慶樓)에 올라 세종의 비 소헌왕후를 생각하며 기문을 지어 걸기도 했다. 그러나 경상도관찰사로 재임 시인 1430년, 임금께 예물(禮物)로 바치는 문어가 정결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기도 한다. 요즘으로 치면 도지사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가 문어하나 때문에 관직을 잃었던 이유는, 당시 문어는 중국 황제에게도 바치고 따로 무역도 했으며, 임금이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하는 중요한 진상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는 3년 후 다시 복귀되어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오는 등 탄탄대로를 걷다가 1438년 술에 중독되어 죽었다고 한다. 홍여방의 죽음에 대해서도 조선왕조실록은 놓치지 않고 ‘이조판서 홍여방 졸기’를 기록해 두었다. 그가 죽자 세종은 조회와 시장(市場)을 정지하고 문상을 했으며, 부의를 보냈다. 시호를 문량(文良)으로 내려주었다.

한편, 홍여방이 장기로 유배를 왔을 때는 그보다 2년 먼저 와서 터를 잡고 있던 유배객이 있었다. 바로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곳에 와 있던 이원강이었다. 이원강은 강상인 옥사에서 참형을 당한 이조참판 이관(李灌)의 숙부였는데, 그 집안과 홍여방과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홍여방은 이곳으로 유배를 오기 10일전에 ‘2년 전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된 이관과 심온 등이 반역죄를 저질렀으니 그들에게 더 큰 벌을 내려 달라’는 상소까지 올렸다. 이 상소를 올린 지 10일 후, 그 자신도 대역죄의 죄를 뒤집어쓰고 장기로 유배를 오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는가 보다. 운명의 장난처럼, 서로 싸워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꼭 결정적인 순간에 마주칠 때가 있다. 천리 먼 길, 고개를 넘고 또 넘고 도착한 경상도 장기 땅, 물설고 낯선 장기 땅에서 이제는 같은 대역죄인 신분이 되어 맞닥뜨린 두 사람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둘 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온 것은 마찬가지다. 그때는 내가 왜 그랬을까. 오늘은 이랬지만 내일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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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영 2019-07-16 14:16:06
이상준 선생님의 글 아주 잘 보았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는 자료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