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러시아의 고려인을 현지에서는 까레이츠키라고 부른다. 이들 고려인 55만 명은 우즈베키스탄 19만, 카자흐스탄 10만,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5만, 사할린 4만, 이곳 연해주에 4만 명이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1937년 10월 스탈린이 연해주 고려인 17만2천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결과이다. 스탈린은 연해주 고려인들이 일제 첩자가 될 것으로 우려해 멀리 중앙아시아로 쫓아버렸다. 세계 이민사에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을 독재자 스탈린이 저지른 것이다. 연해주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명령 하나로 이틀분의 식량만 걸머메고 이곳 라즈도리노예역에서 열차에 올랐다. 한 달간의 이동 중 2만여 명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나갔다. 일제로부터 수탈당한 민족이 러시아에서 다시 수탈당하는 비극이다.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황무지 벌판에서 농사를 지어 연명하였다. 이들은 ‘고본질’이라는 독특한 협동영농방식으로 생산량을 대폭 증가시켰다. 고려인 중에는 소련 당국정부로부터 노력 영웅칭호를 받은 사람도 많다. 우즈베키스탄의 김병화는 대표적인 노력 영웅이다. 이들의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을 정도로 비참했단다. 10여 년 전 내가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고려인 2세들 중에는 조선말을 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이들의 얼굴 모습까지도 우리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는 상당히 성공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고난의 세월을 참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 앞에 할 말을 잃었다.

스탈린 사후 그들이 다시 연해주 고향땅으로 오고 있다. 연해주 학술 간담회에서 발표한 이바짐과 김발레리야도 고려인 2세들이다. 우수리스크 노인회 부회장인 이바짐은 첫인상이 무척 당차 보였다. 그는 소련군 출신이란다. 그는 우리말도 잃어버리고 오직 소련을 위해 총을 들었던 사람이다. 그는 이번 발표 때 한국어는 모르고 러시아어로 주제를 발표하였다. 스탈린의 철권 통치하에서 민족어 사용을 금지시킨 결과이다.

그는 러시아말로 발표하고 러시아인 통역 세르게이가 한국어로 통역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였다. 꽃미남 세르게이는 한국에 유학한 러시아 청년이다. 발표자 이바짐은 러시아 고려인들의 비극을 보는 것 같아 씁쓰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우수리스크 민족학교를 운영하는 김발레리야는 예상과 달리 한국어를 잘 구사하였다. 그는 우즈벡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한국어를 독학으로 익힌 장한 여성이다. 그는 우수리스크 고려인 학생들을 모아 우리 문화와 우리말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고려인들이 러시아에서 동화되어 살 수밖에 없지만 우리 민족 전통을 지키는 가정이 많다고 소개했다. 고려인들은 생일, 결혼, 회갑은 반드시 상을 잘 차려 잘 대접한단다. 그래야 죽어서도 제사상을 잘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지난해 조부상을 당하여 딸의 결혼식을 연기시켰다고 전했다. 그들은 아직도 제삿날 부모님 산소를 찾는 전통도 이어 오고 있단다. 우리에게서 잊어버린 조선의 옛 풍습을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어 만감이 교차하였다.

이곳 연해주 일대는 러시아 고려인, 중국 조선족, 남한인, 북한인이 4만 명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모두 민족은 같지만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다. 중국의 조선족은 이곳 시장에서 장사를 한다. 귀국길에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북한 노동자 일행을 마주했다. 하나 같이 키 작고 야위고 초라한 얼굴들이다. 같은 동포로서 연민의 정이 들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레 그들에게 말을 걸고 손을 내밀었다. 일행 중 북한 여성이 ‘북남 수뇌회담을 했으니 이제 우리도 좋아지겠지요.’라는 말로 화답하였다. 정상회담 이후 달라져 가는 화해 분위기를 대변해 주었다. 우리는 평양 순안 비행장으로 먼저 떠나는 그들에게 힘껏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언제쯤 남북주민이 함께 열차를 타고 두만강을 넘나들 수 있을까. /블라디보스토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