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1922년 대구·경북 서화가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교남시서화연구회(嶠南詩書畵硏究會)’는 일제강점기 서구의 개방정책에서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발전시키며 지역 서화계의 교류와 교육을 위해 개설된 기관이다. 서화 교육을 담당하는 강습소 역할 외에 서화 전람회와 강연회를 개최하고, 서화를 상설로 전시할 수 있는 전시관 등을 설립하려는 취지로 활동을 이어간 교남시서화연구회는 당시 ‘서화(書畵)’와 ‘미술(美術)’이라는 두 단어가 주는 시대적 변화를 단편적으로 보여주었다. 서구미술문화를 대표하는 서양화보다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민족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을 서화를 통해 계승하려는 노력을 이어나갔다.

서구미술의 대표적인 표현양식인 서양화는 1900년대 초반 일본에서 서양미술을 익히고 귀국한 한국인 화가들에 의해 본격 이루어졌지만, 그 이전 각 지역에서는 이미 활동했던 일본인 화가들의 활동이 적잖은 자극이 되었다. 학교 교육과 미술공모전 출품을 위해 보급되기 시작했던 서양화가 일본인들에 의해 교습되는 것은 단순한 기술 전수를 넘어 문화를 통한 이념과 의식의 확산이라는 점이 식민체제하에서는 더 큰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화가 석재 서병오는 앞서 교남서시화연구회를 결성하고 영남지역 서화인들과 애호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미술 단체 운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그리고 지역서양화가 1세대라 할 수 있는 이여성과 이상정 등과 함께 서양화 보급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922년 5월 대구부청(당시 경상북도청) 내에 위치했던 뇌경관(賴慶館)에 ‘교남시서화연구회전’을 개최해 대구 전통서화의 현주소와 발전 가능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3년에는 대구의 청년 지도자였던 이여성, 정운해, 서건호, 서병인 등이 마련한 ‘대구미술전람회’에서는 대구 서양미술의 본격적인 발표장이 되었다. 이 전시는 당시 지역 미술인들이 주도한 대구 최초의 서양화 전시였다.

서성로에 있었던 노동공제회관(구 은사관)에서 열린 전시회는 새로운 미술 양식을 감상하며 배울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관람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반응 때문이었을까. 1923년 12월 이상정과 이여성, 황윤수, 박명조, 정용택, 그리고 경북 청도의 부호였던 상계도가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위해 ‘벽동사(碧瞳社)’를 설립한다. 이는 교남시서화연구회와는 또 다른 근대미술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육을 위해 대구 문화인들과 지역 유지들이 조직한 교육기관으로 연구소의 위치는 서성로(서성정 1정목 89번지)에서 운영되었다. 이곳은 이상정 본가 옆에 위치해 있었으며, 백부 이일우가 설립한 사설도서관 ‘우현서루’가 인근에 있던 곳이었다. 일본인 상가들이 운집해 있던 북성로와 대조를 이룬 지역으로 대구문화와 정신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대구 근대기 미술교육은 서울, 평양 등 타 지역과 달리 선진화된 미술교육기관을 통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대구미술계는 제전, 선전에 다수의 특선을 내고 있어 경성 다음으로 평양, 부산보다 압도적 우수함에도 아직 미술 단체가 없이 다만 내지인들의 대구미술협회와 조선인 측의 향토회라는 미미한 존재였던 바-’ 라는 1941년 당시 매일신보 기사처럼 대구는 한국의 서양화 도입기에 서울과 평양의 근대화단 형성기와 같은 시기에 활발한 미술 활동이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뒷날 이인성의 ‘양화미술연구소’와 서병기의 ‘향토회 미술연구소’ 등을 설립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 근대기 서화와 미술이라는 시각예술 장르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간 대구미술은 지역예술인들의 화합이 주는 절대적 가치를 승화시켜 대구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는 오늘날 한국현대미술의 구심점 역할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