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귀연수필가
송귀연 수필가

다시마를 씻고 멸치를 다듬는다. 부추나물무침, 애호박볶음, 계란지단, 오이채, 김치, 이렇게 다섯 가지로 고명을 정했다. 맛있게 차려내야지 다짐을 하지만 마음만 앞설 뿐이다. 에어컨을 켜놓은 부엌이 한증막처럼 더워 연신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친다. 혼자서 허둥대다보니 벌써 오전 새참시간이 코앞이다.

장마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부랴부랴 감자수확을 하게 되었다. 과수(果樹) 사이 노는 땅에 심은 감자는 생각보다 일이 많았다. 막상 급하게 수확을 하려들다 보니 손이 모자랐다. 겨우 세 명 정도 일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귀농한 우린 둘 다 농사일이 서툴렀다. 체계적 일의 순서를 몰라 우왕좌왕이다. 하늘은 곧 비라도 뿌릴 것처럼 먹장구름을 안고 있다. 밖에서는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며 일꾼들이 주인을 부리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옛날 엄마는 일찌감치 아침 설거지를 끝내면서 미리 국수물을 우려내놓고 일터로 향했다. 그러고는 새참 때가 됐다 싶으면 어느새 장만했는지 정갈하게 만든 국수를 차려 내놨다. 호박볶음과 부추나물무침 정도의 고명을 얹어 내놓았지만 맛은 일품이었다. 여남은 명도 넘는 사람들의 새참을 준비하는 엄마의 몸놀림은 민첩했지만 부산하지 않았다. 내가 만든 국수는 코를 빠트리며 요란하기만 했지 결코 그 맛을 비교할 바 못된다.

내가 살던 고향에는 들녘을 가로질러 기찻길이 있었다. 대체로 새참 먹을 시간쯤에 기차가 지나갔다. 시계의 알람처럼 산모퉁이 너머에서 기차소리가 들리면 아버지는 “어, 배가 출출하네. 새참 먹고 하세”라며 일꾼들을 불렀다. 품앗이 온 사람들은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미루나무 아래 논둑에 걸터앉았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마을 쪽에서 엄마가 새참을 이고 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도 새참을 생각할라치면 빠-앙! 하고 기적소리가 들려온다.

김홍도의 그림 중에 ‘새참’이라는 풍속화가 있다. 가히 더운 여름이었는지 열 명의 사람들이 윗도리를 벗다시피 하고 모여 있다. 앞섶을 풀어헤치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아낙이며, 큰 밥그릇을 든 아이, 삿부채와 술병을 든 사람, 사람들이 밥 먹는 모양을 저만치 떨어져 쳐다보고 있는 개까지 등장한다. 아마도 농사일을 하고 어데 논둑에 앉아 새참을 먹는 모습을 그렸지 않나 싶다. 어릴 적 농번기에 만날 수 있었던 정겹고 낯익은 풍경이다. 새참을 먹기 전엔 항상 고수레를 했다. 제일 나이 많은 어른이 올해농사 풍년들게 해달라고 기원을 했다. 고수레는 음식을 먹기 전 첫 숟가락의 음식을 떠서 지신이나 수신, 또는 산신에게 바치던 제의(祭儀)의 습속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고수레를 한 음식은 근처의 새와 벌레가 먹게 될 것이다. 비록 가난했지만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인정을 나누었던 그때가 지금보다 풍요로웠다. 새참 땐 모두 논두렁으로 모여 들었다. 푸짐하게 여분을 마련한 새참은 넉넉한 인심을 나누었다. 거나하게 막걸리 한잔 들어가면 광배엄마는 육자배기를 한가락 구성지게 뽑곤 했다. 막걸리가 과해진 만석이 아저씨는 가슴을 풀어헤치고 한나절 단잠에 빠졌다. 헤벌쭉한 입가에 파리들이 앉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요즘은 거의 집에서 새참을 만들지 않는다. 아낙들이 양푼을 이고 걸어가는 대신 철가방을 매단 오토바이들이 쌩쌩 들길을 내달리는 광경을 자주 접하게 된다. 품앗이를 하며 서로 일손을 도우고 둘러앉아 농사정보도 함께 나누는 광경들은 이제 보기 힘들어졌다. 새참이 주는 고유의 정서가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어느새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두 번의 새참을 장만하랴, 감자를 캐랴, 정신없이 하다 보니 감자들은 크고 작은 박스에 잘 갈무리되었다. 제대로 씻지도 않고 누우니 팔다리며 허리가 욱신거리고 고단함이 온 몸으로 밀려든다. 다행히 장마는 조금 늦게 온다는 예보다. 마당에선 쓰르라미가 울고 고라니들 짝 찾는 소리가 이 산 저 산에서 들려온다. 낮에 장만했던 형형색색의 고명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스르르 감자이랑같은 눈꺼풀이 닫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