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2010년을 기점으로 세계경제의 위상에 변화가 표면화한다. 40년 가까이 부동(不動)의 2위를 고수했던 일본이 중국에 3위로 밀려난 것이다. 두 나라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벌어져 작년의 경우 중국의 국내총생산은 13조 6천억 달러, 일본은 5조 달러 언저리다. 흥미로운 점은 3위 일본, 4위 도이칠란트, 5위 영국, 6위 프랑스의 국내총생산이 14조 5천억 달러로 2위 중국과 거의 맞먹는 규모라는 점이다.

이런 추세 때문에 미국 제일주의를 주창한 트럼프가 중국을 강력하게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진 21세기 미국의 딜레마가 수치로 확인 가능한 시점에 우리는 살고 있다. 2010년 출간된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럽의 시대구분 방식인 기원전(BC)과 기원후(AD) 대신, 중국 이전(Before China)과 중국 이후(After China)로 경제사를 구분하는 학자들이 생겨났다는 지적은 통렬하다.

습근평(習近平) 등장 이후 중국이 야심적으로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은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를 개창(開創)한 진시황과 비교되는 현대판 시황제 습근평의 자신 넘치는 프로젝트. 중국을 기점으로 하는 21세기 신실크로드를 육상과 해상의 두 가지 노선으로 육성하겠다는 원대한 기획. 한반도의 남단에 갇혀 70년 넘도록 살아온 우리로서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발상이다.

그러나 교육현장에서 중국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바라보는 중국의 야망은 허망해 보인다. 지난 학기에 중국 유학생 5인을 포함한 다국적 학생들과 ‘영화로 보는 세상’ 수업을 진행했다. 마지막 수업에서 2002년 장예모가 연출한 영화 ‘영웅’을 다루었다. ‘영웅’은 사마천의 ‘사기열전’가운데 ‘자객열전’의 형가(荊軻)를 바탕으로 했음을 밝히고 물었다. 중국 학생들 가운데 ‘사기열전’을 읽은 학생들이 있는지?!

형가와 ‘자객열전’은 고사하고 사마천이나 ‘사기’ 내지 ‘사기열전’에 대해서 그들은 들어본 적도, 읽은 적도 없었다. 돌이켜보니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동파의 ‘제서림벽 (題西林壁)’을 강의하다가 맞닥뜨린 떨떠름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가로로 보면 고개요, 돌려보면 봉우리라. 원근(遠近)과 고저(高低)에 따라 그 모양이 각기 다르구나. 여산(廬山)의 진면목(眞面目)을 알지 못함은 내가 산속에 있기 때문이리라.”

장강 남쪽, 파양호 북쪽에 자리한 여산은 1996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지질공원이자 문화유산이 넘쳐나는 곳이다. 도연명, 이백, 백거이, 왕안석, 소식, 곽말약에 이르는 1천500여 시인과 묵객이 아름다움을 예찬한 절승(絶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거기서 나고 자란 중국 유학생은 그 내용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다른 학생들은 뭐, 그런 게 있기나 했나, 하는 생뚱맞은 얼굴이고.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국가의 기세가 세계최강 미국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고, 유라시아를 통관하는 육로와 해로를 개척하면서 세력을 확대해가는 중국. 전통적인 제국의 진면목을 21세기에 재연해보려는 야심만만한 포부로 가득한 중화세계. 하지만 중화의 청춘은 지나온 그들의 역사와 문화와 예술을 알지 못하고, 지금과 여기에 탐닉하면서 비상하는 조국의 힘을 막연히 향수(享受)하고 있을 뿐이라는 감상이다.

20세기 초두(初頭)에 노신은 ‘아큐정전’에서 어리석은 중국인의 ‘정신승리법’을 통렬하게 풍자함으로써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제시했다. 덩치만 크고 내면은 텅 비어있는 지금과 여기의 중국인에게 무엇이 절실한지 갈파한 노신. 그의 가르침이 21세기 신흥강국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