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의 세 가지 색 삼부작 ‘블루’ ‘화이트’ ‘레드’

‘레드’
‘레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은 각국의 이해타산에 의한 계산기를 두드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초유의 사태가 가져 온 충격적인 현실의 폐허 더미 속에서 인간들은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초인과 악당, 삶과 죽음, 자유와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며 ‘반성’과 ‘자책’의 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이 시간도 그리 깊고 길지 않았다. 승전국들이 두드린 계산기는 ‘패권’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들의 계산기를 의심하기보다는 결과치에 치중한 발빠른 각종 협정과 조약들이 체결되어 갔다. 이후 세계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냉전시대를 겪으며,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니었던 한국은 지금까지도 분단국가로 남아 전세계 뉴스의 중심에 등장하곤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반성이 충분하지 않았는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던졌던 수많은 질문과 철학적인 사고들이 깊지 않았기 때문이었던가. 혹은 인간이 가진 본성적인 악의 기운이 너무 강하여 반성과 질문이 그나마 지금의 평화로운(?) 상황을 지탱하고 있는 것인가.

전지구적이지는 않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중심지였던 서유럽을 중심으로 ‘지나친 민족주의는 유럽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판단 하에 협력과 통합을 통한 ‘평화’를 구축하겠다는 시도가 일어난다.

세계의 멸망이 아닌 유럽의 멸망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한 연설에서 “유럽도 UN과 같은 기구가 필요하다”고 언급함으로써 유럽 연합에 대한 최초의 언급을 하게 된다.

1948년 헤이그 회의에서 약 800여명의 통합론자들이 본격적으로 유럽 통합의 구상을 시작하는데, 유럽의 경제, 사회,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통합까지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된다. 이후 1958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6개국이 모여 유럽경제공동체(ECC)를 설립하게 되고, 1967년 뜻을 공유하는 각종 기구들이 유럽공동체(EC)를 결성하게 된다. 가입국이 늘고 정치와 문화적인 통합이 성장하게 되면서 좀 더 견고한 공동체 설립의 희망이 커져갔고, 1991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의 타결과 1993년 발효로 경제공동체, 외교, 안보, 치안까지 하나로 묶는 유럽연합(EU)이 탄생하게 된다.

… 유럽연합의 출범을 앞두고

제작된 이 영화에서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감독의 의견은 ‘레드’의 마지막에

집약된다.

그래도 그 집약이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의미에 대한 여러 해석들 중에서 가장 지배적이고 근접한 것이

‘사랑’이지만 이 역시

모든 퍼즐을 완벽하게

맞추지 못한다 …

△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현대적 질문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평화’에 대한 열망과 반성의 토대 아래 결성된 유럽연합이 지금 ‘경제’라는 요인으로 흔들리고 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스폐인의 경제난과 영국의 브렉시트 모두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는 폐허의 더미 속에서 던졌던 존재론적 질문보다 경제적인 질문을 먼저 던지고 깊게 사유해야만 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역사에 문화적·정치적·사회적·경제적 역사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의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키워드는 무엇인가. 인간의 잘못된 선택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지연장치로써의 정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선택되어져야할 것이다.

‘블루’
‘블루’

1993년 유럽연합이 출범하기 직전에 만들어진 폴란드 출신 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의 ‘세가지 색 삼부작 : 블루, 화이트, 레드’는 프랑스 국기의 색깔이 상징하는 자유, 평등, 박애로 질문을 던진다.

프랑스는 매년 7월이면 ‘프랑스 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성대한 기념행사들이 열린다. 프랑스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이상과 전통을 이어 받았음을 선언하며, 전세계에 이 세 가지 이념을 전한 것을 확인하며 자랑스러워 한다. 200여 년 전에 일어나 프랑스 대혁명이 세계사에서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커다란 전환점이라는 막중한 위치를 가지기 때문이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가진 나라에 대한 감격과 영광의 표현이기도 하다.

전근대와 근대의 기점을 나누는 세계사적인 사건의 결과로 도출된 ‘자유·평등·박애’를 유럽통합을 앞 둔 시점에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는 ‘세 가지 색 삼부작’은 그리 주제를 표현하는 서사가 직접적이지 않다. 우선 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이 던지는 질문의 문항은 간명하지만 그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호락호락하지 않음은 영화의 줄거리는 간명하지만 그 안에 쉽게 해석되지 않는 수많은 은유들이 간단하게 연결되거나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 직접적이지 않고 에두른다. 이쯤이라고 생각했을 무렵에 한 발 더 들어가며 들어 온 길을 지워 버린다. 그리고 남는 것은 선명한 이미지 블루, 화이트, 레드와 세 명의 여주인공이다.

먼저, 자유에 대한 영화 ‘블루’는 ‘기억’과 ‘관계‘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한적한 시골길을 가던 가족들은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줄리는 유명한 작곡가인 남편 파트리스와 다섯 살 난 딸 안나를 잃고 혼자 살아 남는다. 줄리를 둘러싸고 있던 가장 끈끈한 ‘관계’였던 가족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버리고, 떠나는 과정을 이행한다. 먼저 가족과 함께했던 공간인 집을 떠나고, 그 와중에 그들이 함께 공유했던 물건들을 버린다. ‘줄리 드 꾸시’라는 이름을 버리고 결혼 전의 이름인 ‘줄리 비용’으로 살아가지만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기억들과 고통스러운 사투를 벌인다. 유럽통합 기념곡을 만들던 남편의 악보까지 버리고 파리의 집까지 가져 온 유일한 물건인 샹들리에는 푸른색이다. 딸아이가 남긴 유품인 파란색 사탕을 마구 씹어먹거나 푸른 수영장으로 헤엄치며 잠기는 줄리의 모습을 담은 미장센들은 영화의 주제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과거의 기억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지려는 과정에 몰랐던 사실(기억)과 또 다른 관계가 그녀의 도달하고자 하는 자유 속으로 파고든다.

외로움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선택한 자유의 결정이 또 다른 요인들로 기억을 생산(재생산)하고 관계를 형성한다. 슬픔, 우울을 의미하는 ‘블루’는 영화 속에서 다양한 장면에 등장하고 삽입됨으로써 자유와 함께 내포한 의미 그대로 영상언어를 형성한다. 여기에 음악의 시각화를 웅장하고 멋지게 구현함으로써 영화는 블루라는 시각적 이미지와 음악이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어울려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을 남긴다. 특히 악보를 펼쳐들고 손가락으로 짚어 나가는 장면에 울리는 음악은 강렬하다. 영화는 ‘자유란 기억과 관계의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묻는다.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고립되고, 당겨지면서 기억과 관계는 자유의 의미를 훑는다.
 

‘화이트’
‘화이트’

△ 유럽통합 직전에 던진 질문, 아직도 유효하다.

‘세 가지 색 삼부작’ 중에서 ‘평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화이트’는 에두르지 않고 정면으로 전개된다. 폴란드인 미용사 카롤은 프랑스인 도미니크와 결혼해서 프랑스에서 살지만 성적불화로 이혼당한다. 이혼으로 재산을 빼앗기고 방화범이란 누명까지 쓴 채 노숙을 하던 그는 길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폴란드인 미콜라이의 제안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가까스로 폴란드로 돌아 온다.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법정 장면은 장소를 옮겨 폴란드에서 반복된다. 프랑스어와 폴란드어의 의사 소통과 정치·경제적으로 다른 길을 걸어왔던 두 나라의 차이가 형식을 통해 반복되는 것이다. ‘평등’은 ‘자유’와 대치되는 개념이다. 특히 완전한 자유를 이야기할 때 평등은 억압이라는, 자유와 반대되는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도덕적 자유, 정치적 자유 모두 평등과 타협(혹은 절충)한 용어일 뿐이다. 법정 장면의 형식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카롤과 도미니크의 결혼 장면도 반복된다. 그러나 그 반복은 동일한듯 하지만 다르다. 바로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평등의 차이(평등이라는 인식의 차이)와 층위를 말하는 것이다.

구속, 괴롭힘, 억압과 자유, 죽음, 부활이 ‘평등’을 에워싸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구조가 선택의 문제에 있는가 인식의 문제에 있는가를 묻는다. ‘세 가지 색 삼부작’ 중에서 제법 쉽게 읽히는 영화가 ‘화이트’이지만 감독의 질문에 대한 답을 향해가는 순간 다른 연작들과 다르지 않은 난해함을 겪는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시각적·청각적 영화언어는 유려하다.

‘세 가지 색 : 레드’는 연작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레드는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 중에서 ‘박애’를 뜻하고 있으며, 영화 ‘세 가지 색 삼부작’의 총합을 어떻게 마무리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스위스 제네바 대학 학생이며 패션모델로 활동하는 발렌틴은 패션쇼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개를 치는 교통사고를 내게 된다. 개의 목에 달린 인식표를 보고 주인을 찾아가고, 개 주인은 은퇴한 법관이며 남의 집 전화를 도청하는 기벽이 있음을 알게 된다.

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
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

“법정에 있을 때보다 세상 일이 더 잘 보여. 적어도 여기엔 진실이 있지”라고 자신의 기벽을 설명하는 은퇴한 판사. 법의 집행자였던 이의 탈법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그리고 일어나는 일련의 전개들이 도대체 ‘박애’와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연작 시리즈 중에서도 ‘레드’는 난해함의 강도가 강하다. 직접적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주제와 연관된 최소한의 장치를 쉽게 제공해주지 않는다. 다만 ‘자유’와 ‘평등’이 대치되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지만 ‘박애’ 안에서 포용될 수 있음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세 편의 영화는 법정이라는 장소에서 스치듯 서로 만난다. 그리고 유리병을 재활용하는 노인의 모습이 장소와 방향을 달리해 보여진다. 각각의 영화에서 특정한 기억들은 반복되고, 약간의 차이들을 가지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반복되는 지점이 있으며 결을 달리한다. 장소의 겹침과 특정 장면의 반복은 동시대성을 말한다.

유럽연합의 출범을 앞두고 제작된 이 영화에서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감독의 의견은 ‘레드’의 마지막에 집약된다. 그래도 그 집약이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의미에 대한 여러 해석들 중에서 가장 지배적이고 근접한 것이 ‘사랑’이지만 이 역시 모든 퍼즐을 완벽하게 맞추지 못한다. 사람의 수만큼 많은 세 가지 정신의 층위를 유럽통합이라는 하나의 거대조직 안에서 얼만큼 녹여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1993년 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은 먼저 던져 보았다. 2019년, 그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며 해답은 요원하다.

/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 위에 소개된 세 편의 영화는 네이버영화와 구글플레이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