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조선시대 외교를 흔히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 한다. 사대는 대중국 외교를 말하고 교린은 중국을 제외한 주변 여러 나라와의 외교를 가리키지만 주로 일본과의 외교를 말한다. 대일본 외교는 대중국에 비해 첫 번째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그 중요성은 컸다. 대일본 외교에서 조선후기까지 기본지침서가 된 책이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이다. 이 ‘해동제국기서’에 ‘신이 듣건대, 이적(夷狄)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外征)에 있지 않고 내치(內治)에 있으며, 변어(邊禦)에 있지 않고 조정에 있으며, 전쟁하는 데 있지 않고 기강을 바로잡는 데 있다.’ 라는 대목이 있다. 즉 국가의 외부 적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에 있지 않고 내치에 있다는 것이다.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 되던 해, 선조시대는 내치에서는 실질을 좇아 현실에 변용하기보다는 과거를 인습하는 풍조로 현실 대응의 한계가 드러났다. 조정은 동인과 서인의 당파로 사분오열돼 권력 다툼의 장이 됐고, 인재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일본 통신사로 갔다 1591년 3월 귀국한 서인출신 정사 황윤길은 풍신수길에 대해 지략가로 보고 전쟁의 위험을 보고한 반면, 동인출신 부사 김성일은 쥐에 비유하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했다. 이런 상반된 보고는 당시 동·서인으로 갈린 정치상황에서 객관적인 보고가 가능했을지 여부도 불확실한 것이었다. 조선은 1555년에 일어난 을묘왜변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꾸준히 대비책을 마련해오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이어진 평화로 대규모 전쟁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고, 일본의 군대규모를 과소평가했다.

성벽보수와 축성의 토목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반발과 신중론을 펼치던 신하들의 반대로 국방은 큰 차질을 빚고 있었다. ‘징비록’에 임진왜란 발발 직전 신립을 만난 류성룡은 ‘태평세월이 너무 길었소, 그래서 병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급변이 일어날 때 그에 항거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요.’라는 기록을 남겼다. 선조는 김성일의 보고를 따랐고, 류성룡의 전쟁대비책에 대해 한정된 국방 예산을 이유로 수군까지 없애자 일본 침략에 대한 마지막 보루까지 무너졌다. 임금이 전쟁위협을 애써 외면하며 일상의 삶을 유지하려 했으나 조총으로 무장한 20여 만명의 왜적이 전면전을 일으키자 조선은 순식간에 초토화되고 백성들은 도륙당했다.

조정에서 급히 동원령을 내렸으나 이미 군역과 조세제도의 부패와 난맥상으로 국방시스템은 붕괴되어 있었고 전쟁 대비에 적극적이었던 서인세력마저 조정에서 축출되면서 전쟁위험은 더욱 커졌다. 임금과 조정을 장악한 동인세력은 막연한 낙관론에 기대어 근본적인 대책에 미온적이었다. 항전할 의사가 없는 선조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처음부터 요동으로의 망명을 목적에 두고 정치적 술수를 발휘하여 신하들의 반대에도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파천하여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신했으나, 망명은 명나라로부터 거부당했다. 이 무렵 육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해상권을 이순신이 장악하며 전세가 서서히 역전되자 선조는 의병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나간 김성일은 ‘만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며 병란 중에 덮친 전염병을 구제하다가 병에 전염되어 56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15년 후 백성을 버린 임금도 치세를 마감했다. 조선사에서 가장 큰 외세와의 전쟁인 임진왜란이라는 7년 전쟁은 큰 시련을 예고하며 시작됐고 끝났다. 이 역사적인 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군경의 경계망을 뚫고 동해 삼척항을 통해 귀순한 ‘북한 목선 사태’는 군의 해상경계작전에서 실패했다. 투철한 군 정신에는 ‘공은 부하에게, 책임은 나에게’란 말이 있다. 이 구멍 뚫린 경계실패를 놓고 책임져야 할 국방장관의 어정쩡한 태도는 ‘공은 나에게, 책임은 부하에게’로 해석된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초병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맥아더의 명언이 떠오른다. 400년 전 조선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클로즈업되는 것이 나만의 기우이길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