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며 상해 임정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연해주의 임시 정부인 대한국민의회는 상해임정보다 한 달 앞서 설립되었다. 그래서 올해는 연해주 항일 운동 발자취를 찾는 사람도 많다. 독립운동 정신계승 사업회 소속인 우리 일행은 3박4일 일정으로 지난달 28일 연해주로 학술 탐방을 떠났다. 대구 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3시간도 안되어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나라는 러시아 입국 비자가 면제되었고 입국신고도 자동으로 처리되었다. 내가 자주 다녔던 10년 전보다 입국 수속이 훨씬 간편해진 것이다. 당시 우리는 2시간 동안 짐을 조사받는 등 입국수속이 까다로웠다. 우리의 국력이 향상된 탓인지 공항에서부터 기분이 매우 좋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시가지 모습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한국에서 수입된 중고차가 그대로 한글 표시를 지우지 않고 다녔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밀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다. 해삼이 많아 해삼위(海蔘威)라고 불리운다. 이곳 일대는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으며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대를 이어 살아왔던 낯설지 않는 땅이다. 우리나라 함경도와 두만강을 사이에 둔 이 지역은 선조들이 내왕이 잦았던 지역이다. 한말 1863년 함경도에서 13가구가 포시에트 부근 연추(크라스키노)에 처음으로 이주하였다. 연해주는 1937년 스탈린이 강제 이주시키기 전에는 고려인 17만 명이 거주했던 곳이다. 이곳은 일제를 피해 이주한 조선인들이 다시 멀리 중앙아시아로 유배된 비운의 원한의 땅이다. 아직 중앙아시아 일대에 약 50만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우리 팀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에서 항일 운동 관련 학술대회를 가졌다.

뒤이어 우리는 선조들의 항일 운동의 현장을 찾아 나섰다. 조선인들 최초의 거주지 지신허(知新墟)에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거쳐 우수리스크까지 둘러보았다. 불행히도 연해주 어디를 가나 고려인들의 삶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유물과 유적은 온데간데없고 근년에 마련된 기념비와 표지판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디를 가나 우리말을 하는 고려인 동포를 찾아보기 어렵고 그들의 생활은 대체로 어려웠다. 민족의 해방은 남북 분단으로 이어지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은 우리와 국교를 단절했다.

소연방이 해체된 후 1990년 한국과 러시아는 정식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번 학술 탐방은 연해주에서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과제를 안겨주었다. 무엇보다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조들의 유물 유적부터 보존하는 일이다. 특히 연해주에는 일생을 항일과 독립 투쟁을 하다 순국하신 분들이 의외로 많다. 유인석, 이상설, 최재형, 안중근, 문창범, 이동휘, 장지연, 신채호 등이 그들이다.

이 밖에도 김알렉산드라 등 사회주의 항일 혁명운동가들도 수 없이 많다. 다행히 안중근 의사가 결의한 단지 동맹비가 건립되어 있다. 조국이 해방되지 않으면 이곳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긴 이상설 지사의 유허비도 이곳 사이펀 강가를 지키고 있다. 최재형 선생의 생가도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어 무척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항일 애국지사들의 족적은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선 상해 임정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선생의 생가부터 보존하여야 한다. 신한촌의 그의 생가는 이미 슈퍼마켓이 되어 표지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조선인 최초의 이주마을인 지신허는 러시아 군인들이 길을 막아 가수 서태지가 세운 마을 표지석도 볼 수 없었다. 임시 정부의 모태가 된 전로한민족 중앙회 총회가 열린 장소는 러시아인들의 전문학교로 변해 버렸다. 신한촌의 한민학교 역시 러시아인의 학교로 변신되었다.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는 그 내용이 빈약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러시아 항일운동의 발자취를 하루 빨리 발굴·보존토록 해야 한다. 그것이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이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