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돌아오는 건 좋은 일이다. 모든 게 달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 한여름의 일본 도쿄에 가서 주택가 골목을 걷다 절망 같은 것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곳에 가득한 정적은 일본은 한국과는 다른 사회라는 것을 실감케 한 것이다. 말하자면 NHK 밤 뉴스 앵커의 전언이 한국 앵커들과 달리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도 같았다. 상황은 그러나 상대적이다.

이번에는 여행에서 돌아오자 한국의 서울은 정적의 도시 같다. 차들은 경적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내가 신호 없이 차선을 바꾸자 뒤에서 속력을 내며 달려오던 자동차가 긴 경적 소리를 내기는 했다.

휴일의 한의원은 여는 곳도 다섯 시까지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몹시 아픈 목디스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다. 하지만 배낭을 들고 다니며 그렇게 아프던 몸도 갑자기 나아진 것 같다.

왜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 걸까? 한의원은 전통 시장통 입구에 있는데 파라솔을 편 행상 아주머니들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 같다. 날마다 북적이며 젊은이들이 오가던 골목도 오늘만은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

장마라고 했는데, 잔뜩 흐린 하늘에선 아직 아무 소식도 없고 어디서 남들과 다른 매미 한 마리 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기는 한다.

나는 내가 늘 오가는 학교 운동장 앞 벤치에 앉아 급하디 급한 박미하일 소설 ‘개미도시’를 읽는다. 일종의 우화다.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하는.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서울의 한 벤치에서 바라보이는 세상은 마치 물속처럼 고요하게 느껴진다. 지금 무슨 소설을 쓴다면 하나의 우화가 탄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사회 한국도 지난 삼십 년 전, 이십 년 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나는 이 세계를 이번에는 다시 내가 금방 여행 갔다 돌아온 세상과 견주어 본다. 일본도, 한국도, 금방 다녀온 세상도 다 ‘상대성 원리’의 지배를 받는 어떤 그릇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릇은 더 큰 것 앞에서는 작고 더 작은 것 앞에서는 크다. 소리들에 대해서도 그릇들은 모두 상대적이다. 나는 이 상대적인 사회 속으로 돌아와 소리 없는 것 같은 티비에서 펼쳐지는 어떤 ‘연기’ 행위들을 본다. 한국과 북한, 미국의 정상들이 판문점에 모였다.

그것은 한 상대적인 크기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뿐이다. 내가 찾아갔던 그 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은 아무런 관심도 끌 수 없을 사건이다.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것, 여행이 주는 효능이다. 내가 이 차원에 놓일 수도 있고 저 차원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지금 이 차원에 속해 있을 뿐이라는 것, 여행이 선사하는 또 한 번의 인식이다.

나는 여러 차원에 속해야 하고 이 차원에 매이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아무 차원에도 있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는 깊은 자유가 필요할 때가 있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