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한 재벌가 사람들의 ‘갑질’ 논란이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었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듯이 그렇게 엄청난 부를 가졌으면 마냥 여유롭고 자적(自適)하게 살아갈 수 있을 터인데, 사실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분노조절장애라 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남들에게 패악질을 해대는 모습을 TV화면으로 보면서 자못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불만과 분노의 화신이 되게 하였는지.

재벌회장 집안이면 많은 사람들이 선망의 눈길로 바라볼 만큼 경제적 풍요나 사회적 지위가 최상류층이다. 그런데 그것이 삶의 질이나 만족도에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어서 세간에 적지 않은 충격파(?)를 일으켰다. 재물도 지위도 아니라면 무엇이 만족도 높은 양질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가.

삶의 질을 말할 때는 흔히들 물질적 조건을 우선으로 꼽는다. 헐벗고 굶주리는 삶이라면 질을 따질 여유조차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삶의 질에 비례하는 조건도 아니고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넘치도록 많이 가졌음에도 만족을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소박한 것으로도 만족한 사람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나 명예도 삶의 질을 결정하는 조건으로 들 수 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만족감이 덜한 것이 보통의 인심이다. 그래서 돈을 주고 사서라도 지위와 명성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도 물질적 부와 마찬가지로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높은 지위나 만인이 환호하는 스타덤에 오른 사람도 우울증에 걸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이다.

결국 자존감의 문제인 것 같다. 부의 축적이나 지위나 명예를 얻으려는 것도 자존감을 높이려는 수단이 아닐까. 자존감이란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을 줄인 말로,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재물과 지위, 명예가 자존감을 높여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곧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재벌이나 고관대작들 모두가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는 아니지 않는가.

경쟁에 이겨서 남보다 많이 차지하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만으로는 자부심을 가질지언정 자존감을 높일 수는 없다. 진정한 자존감이란 나누고 배품에서 오기 때문이다. 많은 재물이나 높은 지위는 그만큼 나누고 베풀었을 때 비로소 가치와 보람을 갖는 것이다. 오로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재물과 남에게 군림하기 위한 지위는 손가락질이나 받기 마련이지 자존감을 높여 주지 않는다. 재물과 지위를 내세워 갑질이나 일삼는 자들을 누가 존중하겠는가. 남에게 존중 받지 못하는 자존감은 자만심일 뿐이다.

앞의 그 재벌가 가족은 자존감이 별로 없는 사람들인 것 같다.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남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 남에게 지탄받을 짓을 한다는 건 자신을 천대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것에 걸맞게 아랫사람들에게 너그러이 베풀고 살았더라면 진심어린 감사와 존경을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보람과 자존감도 한층 높아졌을 것이다. 남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었을 때 느끼는 뿌듯한 존재감이야말로 자존감의 바탕이 되는 것이므로.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것도 삶의 질을 높이는 요소가 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도 있지만, 사람에게는 물질적인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인문학적 교양의 바탕이 되는 지성과 감성의 향상을 위한 공부가 필요한 까닭이다. 그것은 또한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