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연극은 있어왔다. 이러한 연극의 운문적 특성은 시로, 연극의 산문성은 소설에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도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연극은 있어왔다. 이러한 연극의 운문적 특성은 시로, 연극의 산문성은 소설에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도 있다.

희곡이나 시나리오를 읽을 땐 배우들의 목소리를 상상적으로 떠올려 보면 좋다. 내가 연출가가 되어서 이 장면은 이렇게 연출하면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훨씬 재미있다. 얼마 전엔 사람들과 모여서 이런 희곡 읽기를 했다. 사람들과 같이 책을 읽는 일은 참 좋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많은 희곡을 읽었지만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몰리에르의 ‘상상병 환자’이다.

‘상상병 환자’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 희곡을 번역한 정연복 선생님이 우리의 책 읽기를 풍문으로 듣고 우리의 독서 모임에 참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번역을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다. 한 번 번역을 쫘악 해놓고 당신이 직접 소리 내어 대사를 읽어봤더니 도저히 공연이 불가능한 번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독성은 물론 발성까지 고려해서 싹 뜯어고쳤다고 한다. 참 훌륭한 번역가란 생각을 했다.

전문가네 합시고, 이 작품의 원제가 ‘Le Malade imaginaire’이니까 제목은 ‘상상으로 앓는 환자’라고 번역해야 옳아! 라고 말하는, ‘내가 옳아병’에 걸린 전문가들도 많다. 그런데 정연복 선생님은 원제가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많이 알려준 제목을 선택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상상으로 앓는 환자’가 아무리 정확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상상병 환자’보다 주인공의 의미가 더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생님의 그런 가치관도 좋았고, 번역은 유려했다.

‘상상병 환자’는 1600년대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주인공은 아르강이다.

아르강은 아무 병도 없지만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아르강의 주치의는 아르강의 그런 상상을 부추겨 비싼 약을 먹여 돈을 번다.

이러한 아르강은 아내가 죽고 재혼하였는데, 두 번째 아내의 이름은 벨린느다. 벨린느도 의사처럼 사악해서 아르강이 죽으면 모든 유산을 자신이 독차지 하기 위해 아르강의 두 딸을 수녀로 만들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프랑스 상속법에 따르면, 자식이 죽거나 수녀가 되면, 남편이 죽은 후 유산을 딸들에게 주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아르강의 두 딸은 모두 착한 데 첫째 딸인 안젤리끄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하지만 아르강은 자신의 주치의의 아들인 또마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고 싶어 한다. 그래야 주치의로부터 무료처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마는 의사가 될 예정이지만, 아주 멍청한 인물로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말하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물이다. 몰리에르가 의사를 유독 사악하게 그린 이유는 몰리에르가 의사를 혐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시대의 프랑스의 의사들은 충분히 혐오를 받을 만한 짓을 했다. 실제로 모든 병의 원인이 치아라고 여겨 태양왕 루이 14세의 주치의는 루이의 이를 전부 뽑아버리도 했다. 또 의사들은 목욕이 해롭다는 이야기를 퍼트려 사람들은 목욕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프랑스 향수 발전에 많은 이바지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등장인물 두 명이 더 남았다. 한 명은 아주 똑똑한 하녀인 뜨와네뜨이고 다른 한명은 아르강의 친동생인 베랄드다. 이들은 아르강이 계획한 멍청한 짓을 슬기롭게 막아낸다. 아르강의 멍청한 계획이란 안젤리끄를 또마와 결혼시키고, 벨린느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는 유서를 작성하려는 것이다. 뜨와네뜨와 베랄드는 아르강에게 죽은 척을 해보라고 한다. 그러자 벨린느는 아르강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그의 유산을 모두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었다 보기 좋게 아르강에게 들킨다. 하지만 안젤리끄는 아르강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는데 이를 통해 아르강은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안젤리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연극은 전형적인 희극으로 실제로 연극을 보면 재밌는 부분이 정말 많다. 정연복 선생님은 아주 재미난 해석을 해주셨는데, ‘상상병 환자’에서 일을 꾸미고 계획하는 사람은 아르강의 똑똑한 동생 베랄드 혹은 매우 명민한 하녀 뚜아네뜨가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을 했다. 정연복 선생님은 어쩌면 이 모든 해프닝의 중심에 아르강이 있고, 아르강이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계획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주치의나 벨린느가 자신을 기만하고 자신의 돈을 축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아내 벨린느의 시커먼 속을 이미 모두 알고 있으면서 눈감아 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르강은 벨린느의 악행과 악덕은 물론 안젤리끄의 선량함과 뚜아네뜨의 충성심까지 모두 뒤죽박죽으로 섞는 ‘한바탕 소동’이 되도록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뒤죽박죽된 상태 이것이 삶의 진실이라는 것을 아르강이 선포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함께 책을 읽은 분들의 통찰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수업을 들으러 오시는 A는 희곡이 처음이라고,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그 독법이 치명적이었다. A는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자신의 잘못을 잘못으로 받아들이는 자, 오이디푸스! 그러나 그런 오이디푸스와 달리 치부를 끝끝내 거부하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B는 공감대장이었다. 모든 작품에 자신의 주위 분들을 대입해서 읽는 아주 독특한 독법을 보여주었다.

이를 테면 오이디푸스를 읽으면 남편이 생각난다고 했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혼자 알고, 혼자 고통스러워하면 되는데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을 알리고 또 자신의 고통까지 공유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A의 남편 역시 자신이 힘들면 혼자 이겨내지 못하고 꼭 주위 사람들이 자신이 힘든 걸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맨날 몸이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는 상상병 환자인 ‘아르강’은 또 A의 시어머니를 닮았다고 한다.

그리고 무척 많은 비밀을 간직한, 목소리가 마치 성우 같았던 C도 있다. C는 ‘인간 본성에 대해서’(에드워드 윌슨)을 언급하면서 ‘벌의 행동의 가짓수가 인간의 범주에서 얼마 되지 않듯이 인간 행동의 가짓수도 더 큰 능력을 가진 자가 볼 땐 벌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오이디푸스 고통이라는 것도 자기 인식이 감당해야 할 정도의 크기 밖에 되지 않는다는….’

나는 책 읽기를 진행하면서 특별히 한 것이 없다. 그냥 사람들과 책을 함께 읽고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그런 사람도 필요하니까 말이다.

델리스파이스라는 가수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의 가사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 외에 다른 가사는 없고 이 말만 주구장창 반복한다.

이 노래를 들어본 사람들은 이 무한히 반복되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말에서 ‘나’의 애절함을 떠올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 짜증 가득한 ‘나’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가수가 무엇을 의도하고 이 노래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작품이든 창작자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을 읽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가를 찾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작품은 창작자가 아무리 열심히 책을 써도 그것을 읽는 독자가 없으면, 창작자가 작품을 쓰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듣는 것과 말하는 것. 나는 이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함께 독서 토론을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을 잘 들어주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좋은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이고, 정말 문제는 그 좋은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더 큰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