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표준근로계약이 경종 울려

지난해 9월 27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수동 KBS드라마 ‘최고의 이혼’ 제작현장에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관계자가 제작 스태프의 처우 개선과 근로기준법 준수를 촉구하는 드라마 세이프(Drama Safe) 1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월화수목금금금’ 밤샘 촬영이 일상이던 방송가에도 1일부터 주 52시간 근로제가 공식 도입됐다. 주 68시간 근로제를 통한 1년간 유예 기간이 있었지만 시범 운용 때조차 방송사와 스태프 간 갈등이 여러 차례 노출되면서 주 52시간 근로 문화 정착까지는 험로가 예상된다.

◇ 관습으로 남은 ‘쥐어짜기’… 길고 험난한 근로환경 개선

방송가는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저임금 고강도 장시간 노동, 위계에 따른 인격 모독 등 열악한 환경이 관습처럼 뿌리내린 곳으로 꼽힌다. 방송사들은 스태프와 표준근로계약서를 체결하기는커녕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을수 없는 용역 계약, 또는 팀 단위로 계약하는 턴키 계약을 통해 편법으로 인건비를 아껴왔다. 물론 생방송처럼 찍어내야만 ‘작품 조달’이 가능했던 국내 드라마·예능 시장 분위기를 고려하면 방송사들로서도 하루아침에 쉽게 분위기를 바꾸기는 쉽지 않았을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가 주 52시간 근로를 공식화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방송·제작사와 스태프간 갈등은 대중까지 인지할 정도로 수면위로 떠올랐다. tvN ‘화유기’(2017~2018), SBS TV ’빅이슈‘(2019) 등 촉박한 제작 시간에 쫓겨 발생한 스태프 사고와 방송사고 등이 일어날 때마다 열악한 근로 환경을 개선하자는 주장이 힘을 받았다. tvN ‘혼술남녀’(2016) 조연출이던 이한빛 PD 죽음 후 설립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도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언론단체들 힘을 얻은 스태프는 방송 현장에서 시위를 이어왔고, 방송사와 대형제작사들과의 협의도 본격화했다.

이러한 가운데 주 52시간 적용을 앞두고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이 표준근로계약서를 제대로 작성하고 이행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근로자 입장에서 낭보였다.

정부와 국민 차원의 관심이 더해지면서 지상파와 언론노동조합,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방송스태프노조는 지난달 제작환경 가이드라인에 대한 기본 합의를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CJ ENM도 합의에 지지했다. 방송 제작환경 개선이 공론화한 지 수년 만의 일이다.

한빛센터는 “방송 산업 최초로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머리를 맞댄 첫 성과라는점에서 가치가 크다”라며 “이번 가이드라인이 전 방송사, 모든 장르 프로그램으로 확장돼야 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제작비 부담” 불만 속 공식적으로는 “일단은 준수 노력”

1년 유예 기간이 있었다지만 방송·제작사 사이에서는 주 52시간 근로제가 유연성 없이 적용되는 데 대한 불만도 심심치 않게 읽을 수 있다. 특히 법을 준수하는 데 가장 큰 장애로는 나날이 느는 배우 출연료와 시청자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CG(컴퓨터그래픽) 기술 등으로 폭증한 제작비가 꼽힌다.

전체 방송사업 매출은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지상파, 종합편성채널, 케이블 구분없이 전체로 26% 감소(방송통신위원회 방송사업자 재산 상황 공표)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30일 통화에서 “52시간제가 시행되기도 전에 방송사들은 상승한 제작비를 견디지 못하고 드라마 블록을 없애거나 예능으로 대체하고 있다”라며“52시간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다면 제작비 상승 폭은 지금보다 높아지고 프로그램 제작은 더 위축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법안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방송사들은 밝혔다. 지상파들은 하루 앞으로 다가온 52시간제 시행에 대해 “꾸준히 노사 간 협의 중”이라며 “법 취지와 현실을 함께 고려하며, 근무시간 단축이라는 사회적 요구와 회사 경쟁력을 모두 놓치지 않기 위해 합리적 방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라고 했다. 특히 드라마 업계는 사전제작과 B팀 조기 투입 등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입장이다. 전문가들 역시 사전제작이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입을 모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