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봉준호 감독 첫 영화는‘괴물’이었다. 아니었나?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살인의 추억‘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향숙이 이뻤다.”가 재밌기는 했지만 무엇을 겨냥한 것인지가 썩 명료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마더’는 어땠던가? 지인들 중에는 주인공의 연기 때문에 너무나 몰입했다는 의견들이 있었지만, 나는 왜? 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모성애의 덫을 그린다고 보면 되지만 이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정곡을 찌른 듯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나친’ 그로테스크 때문일까?

‘괴물’에서는 한강에 괴물을 살게 하는 원인 물질에 관한 서두 부분이 썩 마음에 편치 않았다. 미군 부대에서 어떤 용액을 한강으로 통하는 하수구에 흘려 넣는데, 이것이 괴물을 낳았다면, 미군이나 미국이 한반도를 주름잡는 ‘괴물’의 실체라는 의미일까? 아니, 그냥 유머로 넣은 것이다? 원인이야 어쨌듯 그 후가 중요한 것 아니냐? 상황 설정을 위한 고심책이었다?

봉준호 감독의 알레고리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점이 있다. 래디컬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한국 사회의 실체로부터 약간 비껴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으로 거장을 비판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황금종려상 ‘기생충’에서 기택의 아들 기우는 과외를 소개시켜 주는 친구로부터 수석 하나를 얻는다. 무거운 돌이다. 영화 앞부분에 엉뚱하게 수석이 나오니 이건 분명 알레고리나 상징으로 해석해야 할 물건이다. 나중에 수해가 나서 반지하방이 전부 물에 잠길 때 기택의 식구들은 저마다 자기한테 중요한 걸 하나씩 들고 나오는데, 기우는 다른 것 아니라 이 무거운 수석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수석은 어떤 의미일까. 탐스러운 돌인가? 아름다운 돌인가? 물에 잠긴 반지하방에서 기우는 이 수석을 들고 나와 그것으로 동익의 비밀 지하실에 숨어살던 사내와 그를 남편으로 여겨 살던 전직 가정부를 살해하려 한다. 그러면 자기 식구들의 ‘기생충’ 생활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일까?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왜 그러한 무모한 계획을 감행했던 것일까? 이 영화는 하루낮의 난장판 살해극이 벌어진 이후에도 엔딩이 내려지지 않는다. 기우는 어쩐 일인지 집행유예로 나오고 아버지 기택이 다시 동익 집의 지하실에 숨어 살며 아들을 향해 모스 부호를 띄우고 그것을 기우가 받아낸다. 살해극 이후의 스토리 전개는 현실성 전혀 없지만 그것을 탓할 여유는 없다. 또 알레고리, 상징 영화에서 무슨 현실성을 찾나? 좀더 그럴싸 했다면 더 좋아겠지만 말이다.

그보다 결국 무슨 수단, 방법을 썼는지 돈을 벌어 그 집을 사 아버지와 해후하는 마지막 장면은 일종의 원한 감정, ‘르상티망’의 ‘완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기묘한 수석은 이 원한감정의 상징물의 위상을 확인하게 된다.

나는 2018년 10월에 ‘한국의 물질주의에 관하여’라는 글을 쓰면서 물이 차오르는 반지하방의 책장에서 파스칼의 ‘서한집’한 권을 들고 나왔다는 어느 시인의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도 숨겨 놓은 금덩이를 가지고 나와야 하지 않았을까? 대신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금욕적으로, 책 한 권을 들고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기생충’의 엔딩보다 이 시인의 장면이 더 좋다.

한국의 예술은 지금 젊은 작가들의 소설도 거장들의 영화도 물질주의적 상상력에서 충분히 자유롭지 못한 것도 같다. 물론 이 말은 ‘기생충’의 성취를 부당히 낮춰 보겠다는 뜻은 아니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