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이분법은 단순하되 힘이 세다. 나와 너, 친구와 적, 이익과 손해로 극명하게 갈리는 이항대립은 선택장애를 일소한다. 기원전 6세기 무렵 낮과 밤의 주기적인 교체에 기초하여 광명과 암흑, 선과 악,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를 창안한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가 배화교(拜火敎)를 창시한다. 배화교에서 구원은 선신과 악신의 대결로 실현된다.

1만2천년 후에 선신(善神) 아후라 마즈다와 악신 앙그라 마이뉴가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 선신이 승리한다. 아후라 마즈다를 따르는 사람은 구원받아 천국에 태어나고, 악신의 추종자는 버림받는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훗날 성서에서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대결로 변신한다. 이분법이 종교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다.

이분법은 선택지를 둘로 제한함으로써 양자택일의 난제(難題)를 전제한다. 양극단의 충돌과 대결이 발생하면 하나뿐인 출구 때문에 극한의 대립과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점에서 제3의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놓는 변증법이 매력적이다. 테제를 설정하고, 그것에 반하는 안티테제를 충돌시켜 양자를 지양(止揚)하는 진테제를 만들어내는 사고방식. 세계를 이렇게 이해하면 세상 모든 것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민중주의(民衆主義) 내지 민중사관이 추동해왔다. 특정한 개인이나 엘리트집단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가 사회발전과 변화를 주도한다는 이념지향이 민중주의 내지 민중사관이다. 1987년 6월 항쟁에 등장한 넥타이부대가 본보기다. 어떤 이념이나 지도자에게 인도된 사람들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으로 모여든 30, 40대 회사원들이 주축이 된 넥타이부대. 그들이 6.29를 이끌어낸 장본인일 것이다.

그들이 출현하기 전에 숱한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투쟁과 희생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독재정권을 타도하려는 열망으로 경찰력과 맞선 넥타이부대의 위력도 잊어서는 안 된다. 불과 30년 전에 일어난 극적이며 감동적인 현장을 추억하는 이가 아직도 적잖을 것이다. 사회학자와 정치학자들은 그런 무명(無名)의 다수를 ‘민중’으로 규정한다.

요즘에는 민중이라는 표현이 흔치 않다. 특정 이념이나 정치적인 지향으로 굳어진 사람들을 가리킬 때 민중이라는 말을 쓰는 것 같다. 이념이나 정파에 얽매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킬 때는 대중(mass)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대중은 특별한 형체를 가지지 않은, 특정(特定)하기 곤란한 다수의 사람을 의미한다. 21세기 대중은 20세기의 대중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의무보다 권리를, 역사의식보다 편의주의를, 영원보다 지금과 여기를 추구한다. 목전의 욕망과 목표에 충실하지만, 각자에게 부여된 책임과 공동체 의식은 희박하다. 독서와 사색에 인색하되 물질적 쾌락추구에 몰두한다. 문명의 발생과 진화원리에 무지하고 둔감하지만, 문명이 가져다준 결과물에 환호작약한다. 21세기 대중에게 스마트폰을 제거해보라. 곧바로 폭동이 발생할 것이다. 세계 전역에서!!

문제는 21세기 한국의 대중이 지식인의 세계에 자유자재로 틈입(闖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정분야의 전문가를 자임하는 판검사와 정치인 같은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대중의 길을 걸으면서 여타 지식인 집단과 스스로 격절(隔絶)되고 있다. 격절이 일상화하면서 분야별, 부문별로 단절과 간극(間隙)이 생겨나고, 그 빈자리를 대중이 점령하는 형국이다.

지식인이 대중을 추종하고, 대중이 지식인을 조종하는 나라의 미래는 없다. 대중추수주의와 포퓰리즘에 사로잡힌 일군의 어리석은 대중 정치인들의 뼈아픈 성찰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