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는
엄청난 노력과 운명의 극복으로 이전에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창조하였으며
러시아의 음악어법을
세계에 데뷔시킨
거대한 대륙의 거장이었다

차이콥스키의 초상.

학생들에게 음악사를 가르치다 보면 다른 교과에 비해 좋은 점이 있다. 역사를 가르치는 이들은 다 느끼는 것이겠지만 기록된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어나 영어 등 다른 교과를 가르치는 분들이 급변하는 시사적인 내용이나 새로 나온 문학작품을 탐독하느라 골치를 앓는 모습을 보면 시사를 읽는 능력이 부족한 필자로서는 다행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음악사를 가르치면 불편한 점도 있다. 과거의 내용, 특히 음악가의 생애를 다룰 때에는 문헌으로만 확인할 수 있기에 여러 가지 해석과 학설이 있을 수 있어 학생들에게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지 늘 의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작곡가의 어두운 측면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 중 한 명이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Pyotr L.Tchaikovsky·1840∼1893)이다.

한 해의 마지막에 이르면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곡이 3곡 있다. 바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4악장 환희의 송가’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그리고 차이콥스키의 발레음악 ‘호두까기 인형’이다. 앞의 두 곡들은 다소 장엄하며 인류의 평화와 소망을 노래하고 극적이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을 다룬다. 그러나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은 다른 두 곡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지극히 동화적이고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 음악도 매우 재미있으며 변화무쌍하며 이국적이다. ‘사탕요정의 춤’에서는 동심을 자극할만한 첼레스타 같은 특수 악기들도 나오는데 마치 ‘오르골’과 같은 효과를 내기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다.

차이콥스키 음악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선율은 아름답고 선명하여 한번 들으면 결코 잊지 못할 정도로 각인되며, 그 선율의 발전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확대의 효과를 자아낸다. 화성의 사용은 조바꿈이 많으나 지극히 극적이고 자연스러우며, 관현악법도 대규모의 악기 편성으로 압도적이지만 극적이며 효과적이다. 차이콥스키 음악의 주목할 점은 발레음악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발레라고 하면 그 발상지가 프랑스임에도 러시아의 키에프나 볼쇼이 발레단을 떠올리는데 그것은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등을 남긴 차이콥스키의 업적이라 볼 수 있다. 발레를 제외하더라도 음악만으로도 훌륭하며 세 곡 다 연주 시간이 길지만 짧게 구성된 하이라이트 음반이 많이 있으니 꼭 감상해보길 바란다.

흔히 예술에서 남성과 여성의 특징은 다르게 나타나는데 남성은 감정적이고 열정과 폭발적인 디오니소스적인 에너지를, 여성은 이성적이며 단아한 아폴론적인 에너지를 표현한다 차이콥스키는 동성애자였으므로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서유럽의 우아하고 지성적인 낭만주의적인 아폴론적인 음악유산과 디오니소스적인 중앙아시아의 야생적이고 광활한 표현의 이미지를 하나의 작품에서 결합시킨 최초의 작곡가였다. 19세기 러시아의 음악계는 루빈스타인(Rubinstein)형제, 안톤 아렌스키(Anton Arensky·1861∼1906)로 대표되는 서구 낭만주의를 따르는 이른바 ‘서구파’와 M. 무소르그스키(Muss orgsky ·1839∼1881), M. 발라키레프(Balakirev ·1837∼1910) 등의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음악적 재료와 감성으로부터 서구의 음악과는 다른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고자 하는 러시아 5인조가 대립하는 시기였다.

 

차이콥스키 후원자 폰 메크 부인의 초상.
차이콥스키 후원자 폰 메크 부인의 초상.

차이콥스키는 이 두 그룹의 어느 쪽에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의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과 교향곡 2번‘소아시아(Ukraine)’‘현악 4중주 제 1번’ 등에서는 민요를 본격적으로 사용하였고 그 이후의 음악에서도 러시아의 정서를 표현하는 대작들을 선보이나 두 가지 양식이 융합되어 어느 한쪽으로의 확실한 색채를 가지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된다. 정규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않은 러시아 5인조 작곡가들에게는 서구 낭만파 음악에 늘 대립적이었으며 러시아 음악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서구음악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로 여겼다.

차이콥스키가 곡을 초연하고 나면 이들에게 신랄한 혹평을 받아야 했고 음악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아니라 비판을 위한 비판이 쏟아졌다. 차이콥스키는 소심한 성격으로 평소 다른 작품에 대한 언급을 조심하였다 하니 그 마음고생이 매우 심했을 것이다.

서구의 낭만파 음악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도 혹평은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피아니스트의 영원한 노스탤지어인 ‘피아노 협주곡 1번’ 은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1829∼1894)에게 ‘바이올린 협주곡’은 레오폴트 아우어(Leopold Auer·1845∼1930)에게 심한 혹평을 당하며 연주불가 판정을 받았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음악 비평가인 E.한슬릭 (Eduard Hanslick·1825∼1904)은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사상 처음으로 음악작품에서도 악취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라며 유례 없는 혹평을 퍼부었다. 이러한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두 그룹의 인물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음악양식에 그들이 적대하던 양식들이 복합되어 있었던 것이며 둘째는, 두 협주곡이 독주자에게 익숙한 협주곡의 형식을 탈피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두 곡을 들어보면 솔리스트보다 오케스트라의 연주 부분이 더욱 강조되며 솔리스트를 돋보이게 해주지는 않는다.

차이콥스키는 동성애자였다고 서두에 밝혔는데, 당시 그리스정교(동방교회)를 종교로 가졌던 러시아는 매우 보수적인 사회였다. 동성애는 받아들여질 만한 사회적 환경이 되지 못했으며, 발각될 경우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가 37세가 되던 해인 1877년 9세 연하이며 모스크바 음악원의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에게 열렬한 구애를 받아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소심했던 차이콥스키는 당시 오페라 ‘에프게닌 오네긴’을 작곡하던 중이었으므로 밀류코바를 극의 여주인공 타치아나로 투사하여 생각하여 구애를 거절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은 극복되지 못했으며 그는 결혼 2주째에 강물에 몸을 던지는 자살시도를 하였다. 결혼한 지 9주 만에 파경을 맞으며 밀류코바는 후에 정신 병원에서 쓸쓸히 죽어갔다고 하니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의 여주인공 ‘타치아나’보다 더 슬픈 운명을 맞는 비운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파국으로 끝난 뒤 차이콥스키의 운명 교향곡이라 불리는 ‘교향곡 4번’과 ‘바이올린 협주곡’등 명곡들이 연달아 작곡되는데 이것은 그의 성정체성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 후 자신의 정체성을 곡에 제대로 투사하였다고 생각된다. 교향곡 4번에서 운명적인 트럼펫 팡파레와 현파트는 고음을 오가며 끊임없이 울부짖으며 운명의 슬픔을 노래한다.

 

차이콥스키와 그의 아내 밀류코바.
차이콥스키와 그의 아내 밀류코바.

그에게 진정한 인생의 연인은 후원자였던 철도 재벌 미망인 ‘폰 메크 부인’이었다. 그녀는 차이콥스키보다 9세 연상이었으며 차이콥스키 음악의 가치를 이해하고 진정으로 존경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14년 동안 매년 6천루블의 재정을 지원하였으며 이 액수는 당시 러시아 보통 공무원의 2년 치 연봉에 해당된다고 하니 큰 액수였다. 지원의 조건은 절대 만나지 않으며 마주치게 되더라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두 번 만난 적이 있는데 두 사람은 눈만 마주치고 지나쳤다. 하지만 14년 동안 무려 1천200통의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그 편지의 내용에서 두 사람의 정신적인 교감을 확인할 수 있다. 고독했던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정신적으로 크게 의지하였으며 그가 어린 시절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매우 강하여 10살이었던 1850년 페테르스부르크 법률학교에 입학할 당시 그를 두고 떠나던 어머니에게 울부짖으며 마차를 따라 뛰어갔다고 한다. 일설로는 그의 동성애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어린 시절의 지나친 집착과 14세 때 어머니가 콜레라로 사망한 것에 정신적인 상처를 입어 어머니 이외의 여성을 숙명적으로 거부하는 이유가 되었다고도 한다. 1890년, 알 수 없는 이유로 재정 지원이 중단된 후 차이콥스키는 매우 괴로워했으며 죽는 순간에도 폰 메크 부인을 원망하는 말을 남겼다고 하니 상실감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차이콥스키는 “영감은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게으름은 인간의 강한 습관이지만 그것에 극복하지 않는 것이 예술가의 의무이다”라고 말하였다.

19세기의 러시아는 예술적 환경이 서유럽과 달라 매우 척박하였으며 자신의 미래를 음악에 투자한다는 것은 무모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는 엄청난 노력과 운명의 극복으로 이전에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창조하였으며 러시아의 음악어법을 세계에 데뷔시킨 거대한 대륙의 거장이었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