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병철의 경북 바닷길 537km, 그 맛과 멋
② 울진, 황홀한 색(色)의 축제

울진 불영사 계곡의 수려한 풍광.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서 바다가 푸른 몸집을 불리는 동안 내륙의 금강송 군락은 거대한 초록 성채를 이루는 중이었다. 초록을 향해 걸어갈수록 나는 점점 바닷길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불영사 계곡이 있는 금강송면 하원리는 울진 바다로부터 불과 18km 떨어져 있지만, 천축산 소나무 숲의 울울창창함이 바다를 잠시 잊게 만들었다. 불영사 계곡은 광천과 몸을 합치고, 광천은 왕피천으로, 다시 왕피천은 동해로 흘러든다. 나는 바다와 기수역을 오가는 한 마리 은어처럼 불영사 계곡을 따라 흐르다 왕피천에서 눈을 씻고 망양 바다에 마음을 내어 말릴 작정이었다.
 

바다를 잊게 만든 철갑 두른 금강송 숲
불영사의 웅장하고 단정함에 감탄 절로
기묘한 자태의 성류굴, 태고의 신비함이
망양정 너머 동해의 분홍 저녁까지…
보석빛 고을은 그리움으로 남아

연등이 걸린 불영사 대웅전.
연등이 걸린 불영사 대웅전.

그런데 불영사 가는 길, 금강송 군락이 발목을 오래 붙잡았다. 백두대간 소나무들의 침엽이 공중을 찌를 때마다 햇살인지 아까시인지가 톡톡 터지며 달짝지근한 꽃내음 뿜어내는데, 그 달콤한 향기에 취해 있는 동안 오후가 깊어지고 있었다. 바다를 잊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해수욕장과 대게를 떠올리며 울진에 왔을 행락객들은 이미 금강송 두꺼운 껍질이 촘촘하게 펼친 그물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솔가지 사이로 불영사 계곡이 서늘한 빛을 내비치는 순간, 감탄이 바이러스처럼 퍼져 사람들은 하나같이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느라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수 만년 솔잎을 삼켜 온몸이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불영사 계곡, 15km에 달하는 청동거울 물길은 웅장함과 세밀한 아름다움을 함께 뽐낸다. 계곡은 그저 바위와 물이 아니라 여울 소리, 물 내음, 새 소리, 나무 그늘, 수면에 비친 하늘, 나비 날개, 돌 틈으로 숨어드는 물고기가 한 몸을 이룬 유기체적 우주다. 불영사 진입로 구간에서는 물가로의 접근이 제한되지만 불영사 일주문을 나와 계곡 중류로 내려가면 누구나 그 차고 맑은 우주에서 탁족과 천렵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살갗에 내려앉는 더위보다 마음에 쏟아지는 속세의 불볕이 더 따가웠기에, 나는 보석빛 계곡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 찍고는 마음의 피서를 위해 불영사로 걸음을 재촉했다. 부처의 그림자가 내 안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길 바라면서.

길디긴 초록 협곡을 빠져나오자 불영사 너른 마당엔 흰 불두화와 붉은 철쭉이 꽃대궐을 차려놓고 방문객을 맞이했다. 요즘은 보기 힘들어진 호랑나비가 꽃덤불로 날아들어 마치 무위사(無爲寺)의 파랑새처럼 극락 풍경 한 폭을 완성하는 동안 나는 경내 한 바퀴를 천천히 걸었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둔 절 이곳저곳에 오색 연등이 걸려 있었다. 간절한 마음들에는 색(色)이 있어 금방 눈에 띄는 법일까. 울긋불긋한 저 소원들은 이미 부처에게 가 닿았을 테고, 내 마음은 당신에게 가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지겠지. 범종이 걸린 범영루 앞 연못에는 부처의 그림자 대신 한 여인의 얼굴만 떴다가 졌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은 평온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부처가 꽃향기로, 햇살로, 약수 한 사발로, 소슬한 바람으로 내 안에 들어온 것이리라.

 

경북민물고기생태체험관에서 만난 천연기념물 황쏘가리.
경북민물고기생태체험관에서 만난 천연기념물 황쏘가리.

불영사에서 나는 세 번 놀랐다. 우선 사찰 주변의 풍경에 감동했다. 조선 중기 문장가 임유후가 불영사에 머물며 남긴 14수의 5언 절구는 불영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삼각봉(三角峰), 좌망대(坐忘臺), 오룡대(五龍臺), 해운봉(海雲峰), 단하동(丹霞洞), 부용성(芙蓉城), 학소(鶴巢), 향로봉(香爐峰), 청라봉(靑螺峰), 종암봉(鍾岩峰), 금탑봉(金塔峰), 용혈(龍穴), 원효굴(元曉窟), 의상대(義湘臺) 등 14곳의 천혜비경을 노래하고 있는데, “푸른 계곡 반석은 여기 저기 놓여있고”(‘향로봉’) “구름은 금모래 위로 지나가”(‘단하동’)는 절경을 보노라면 누구나 마음에 아름다운 문장 하나씩 품을 수밖에 없겠다. 다음엔 그 규모와 단정함에 감탄했다. 깊은 산중에 그렇게 큰 사찰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풍경에 눈을 뺏겨 자꾸 멈춰 서긴 했지만 경내 한 바퀴를 걷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규모가 큰데도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점이 마음을 흡족케 했다. 미관을 해치는 현수막이나 공사 자재는 볼 수 없었고, 나무와 꽃, 채마밭을 가꿔놓은 섬세함만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두 번 놀라고 세 번째, 비구니 사찰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무릎을 쳤다. 구석구석 정갈함에는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특히 불영사는 사찰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하다. 매년 가을마다 사찰음식축제를 열어 사람들에게 건강한 자연 밥상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불영사에선 스님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음식을 만드는데, 김치와 된장은 속인(俗人)들이 그 비법을 탐낼 정도라고 한다. 절의 회주인 일운스님은 사찰음식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스님께 절밥 한 그릇 얻어먹고 싶었지만, 미련한 중생은 주지육림을 향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한 채 불영사 일주문을 나섰다. 저녁엔 대게 다리를 빨며 소주를 마셔야 하니까.

대게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자 그제야 잊고 있던 바다가 생각났다. 초록이 환하게 밝혀드는 천축산에서 나와 바다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다 이내 멈춰 섰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쳐가듯 낚시꾼인 나는 민물고기생태체험관에 어쩔 수 없이 이끌리기 때문이다. 경북 민물고기생태체험관은 왕피천과 광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위치해 있다. 모든 하천은 본류와 지류의 합수머리에서 물고기들의 서식이 가장 활발한데, 체험관은 나름대로 터를 잘 잡은 셈이다. 경북 바닷길이 시작되는 동해안의 허리 울진에서 민물고기 구경이라니, 조금은 생경하지만 웬만한 유명 아쿠아리움 못지않게 공을 들인 수족관에는 형형색색의 우리 민물고기들이 애니메이션 영화 ‘니모를 찾아서’를 연상시키는 아기자기한 군무를 추고 있었다. 황쏘가리부터 갈겨니, 피라미, 납자루, 어름치, 산천어, 각시붕어, 돌고기, 마자, 누치, 꺽지, 모래무지, 쉬리, 잉어, 금강모치, 동사리, 동자개 등등 아름다운 이름들 하나씩 부르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와 함께 금모래 반짝이는 강에서 족대질하던 어린 날의 작고 예쁜 친구들, 그 많던 물고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기억에서 그 예쁜 이름들이 사라지는 것보다 이 땅의 하천에서 은빛 물고기들이 자취를 감추는 속도가 더 맹렬하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

반가움과 쓸쓸함이 뒤섞인 표정을 수족관 유리에 새겨두고 발길을 돌렸다. 불영사 계곡에서는 지상의 초록빛 축제를 감상했고, 민물고기생태체험관에서는 수중의 알록달록한 빛을 보았으니 이번엔 지하의 색을 만날 차례다. 성류굴은 천연기념물 제155호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관광동굴이다. 얼마 전 신라 진흥왕이 560년에 행차한 것을 기록한 명문(銘文)이 발견되기도 했다. 총 길이 870미터 중 약 270미터가 개방된 ‘지하의 금강산’에는 종유석과 석순, 석주 등이 까미유 끌로델의 조각상과 권진규의 테라코타가 흉내 낼 수 없는 기묘한 자연미를 뽐내고 있다. 머리가 큰 관계로 안전모를 정수리에 얹어두고는 좁고 축축한 동굴 내부로 내려갔다. 동굴 내부는 사철 섭씨 15도를 유지한다. 땅 속의 에어컨에 땀을 식히며, 머리를 부딪치지 않기 위해 한 걸음씩 조심스레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동굴 탐방은 내게 ‘인디아나 존스’가 된 것 같은 모험심을 선사했다. 어둠으로 뒤덮인 지하의 색채는 검정이지만, 조명과 어우러진 신비한 빛이 젖은 몸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다 신기한 광경들, 특히 천장에서 동굴 내부의 호수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물소리는 그야말로 자연의 ASMR(자율감각쾌락반응) 사운드였다. 종유석을 쓰다듬어보았다. 부드럽고 반들반들한 촉감이 마치 이제는 만질 수 없는 이의 살결 같았다. 땅 속에서 그리움의 깊이가 더 캄캄해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동굴을 나서야만 했다.

지상과 지하를 두루 다녀온 자에게 울진의 동녘은 차안과 피안이 무화된 세계를 보여준다. 이제 바다와 하늘의 색채를 볼 시간이 됐다. 바다 따로 하늘 따로 볼 필요가 없다. 울진에서는 바다와 하늘이 동색(同色)이기 때문이다. 망양정에 올랐다.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라고 노래한, ‘하늘의 끝’ 같은 바다가 울진 망양정에서 바라보는 동해다. 망양정에서 망망대해를 보며 정철은 ‘세상의 끝’, 즉 우주와 저승에 대한 상상을 했던 것이다. 망양정에 오르니 파도가 끊임없이 아까시 향기를 밀어 올렸다. 술 마신 것도 아닌데 향기에 취했을까? 아무리 눈을 씻어도 수평선이 희미했다. 어느 것이 바다고 어느 것이 하늘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16년 전 스무 살 여름, 학과에서 망양정으로 ‘신라의 푸른 길’이라는 문학 답사 기행을 왔다. 푸른 바다 앞에서 그 아이의 웃음은 더 눈부셨다. 그때 미친 듯 짝사랑하던 여학생은 지금 두 딸의 엄마가 됐다. 내가 정말 그 시간을 살았었나? 모든 게 꿈만 같다. 망양정 너머 동해의 부윰한 분홍 저녁이 마음으로 스며들 때 비로소 알았다. 사랑과 미움이 한 몸이라는 것을, 그리움과 기다림도, 어제와 오늘도, 삶과 꿈도 모두 저 분홍 저녁 속으로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을.

달이 뜨기만을 기다려 월송정을 찾았다. ‘만 그루 소나무 가운데’ 지어진 아름다운 누각이다. 월나라 소나무가 심겨졌다고 월송정(越松亭)이라는데, 달 속의 소나무 月松이 훨씬 아름답다. 달빛 윤슬을 반짝이며 은백색 파도를 밀어오는 바다, 달빛과 구름과 소나무 그림자가 수묵화를 이룬 하늘, 바람 불 때마다 소슬한 소나무 향기가 살갗에 와서 닿았다. 조선 임금 숙종이 “한번 올라 바라보매 흥겹기 그지없다”고 노래한 정자에서 처마 끝에 걸린 달을 한참 바라보니 내가 바로 세상의 왕이었다. 막걸리 한 잔 생각이 간절했으나 찢어진 청바지와 다 해진 운동화 차림의 거지 왕에게 술상을 차려줄 이는 없다. 월송정의 달빛을 한 겹 걸쳐 겨우 남루함을 가린 채 죽변항으로 향했다. 코끝을 찌르는 아까시 냄새보다 상상 속 대게 찌는 냄새가 더 진해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울진이 펼치는 황홀한 색의 축제는 죽변항에서 마침내 완성된다. 잘 익은 대게의 붉은 등딱지와 17.5도의 소주를 담은 초록 병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시인 이병철

    시인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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