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이상준씨
우암·다산 유배생활지 마현리
조선시대 사진 국내 최초 공개
1910년대 장기향교 등 기록돼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장기 마현리. 우암의 적소에는 초등학교가 들어섰고, 우암이 심었던 은행나무는 지금도 교정에 우뚝 서 교목(校木)이 됐다. /향토사학자 이상준 제공

17~19세기 조선시대 실학자인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선생이 포항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장기 마현리 당시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조선시대 사진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우암과 다산의 학문과 정치 사상을 담은 책은 많지만 장기 유배지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은 전무한 실정이어서 이 사진의 공개가 의미를 더한다.

십 수 년간 장기로 유배 온 사람들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는 포항의 향토사학자 이상준씨는 20일 해당 사진을 본지에 공개했다.

장기 마현리 적소의 조선시대 사진은 일본을 오가며 옛날 사진을 수집하던 수집가로부터 이씨가 구입한 것으로 조선시대 말인 1910년대의 장기 마현리 적소 부근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우암이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거제도로 유배지를 옮겨 간 후 적소 부근에는 명장동에 있던 장기 향교가 옮겨와 우암의 학풍을 이었다.

사진에는 장기향교의 모습과 그 앞마당에 우암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의 모습도 보인다. 이 향교는 그 후 일제 강점기 때 장기읍성 안으로 한 번 더 옮겨갔고, 지금은 그 자리에 장기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이상준씨는 “포항 장기면은 조선시대 유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조선왕조실록’등에서 장기로 유배가 결정된 유배인은 약 220여 명으로 확인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단일 현(縣)지역 유배인수로는 국내에서 제일 많다”면서 “특히 우암과 다산이 장기에서 귀양했음을 보여주는 ‘장기 마현리 우암·다산 적거지 주변’의 사진은 국내에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본지는 창간 29주년을 맞아 21일부터 30회에 걸쳐 이상준씨의 우암과 다산의 장기 유배생활을 비롯해 조선시대 장기로 유배 온 사람들의 사연과 흔적들을 연재한다.

연재물 ‘장기고을과 유배문화’에서는 장기 마현리 적소 사진을 비롯해 ‘의금부노정기(義禁府路程記)’와 ‘경상도거춘등도류안(慶尙道去春等徒流案)’ 등 귀중한 고문서들이 수 십여장 공개된다.

이중 ‘의금부노정기’는 헌종 연간(1834∼1849) 의금부에서 죄인의 배소로 지정된 곳을 기록한 것이다. 각 도별 지명 아래에는 서울에서 소요되는 일정, 소속 역(驛) 및 접속역 또는 절도·산·항구이름 등을 기입했다. 각도별로 경기도(37官), 황해도(23官), 강원도(26官), 충청도(54官), 전라도(56官), 경상도(71官), 평안도(42官), 함경도(24官) 등이 기재돼 있다. 이어 뒤에는 소자(小字)로 각도의 섬 이름, 병사수사·방어영장·중군우후, 그리고 면간교대처·각도 산성· 경유로· 역대 정배건의 숫자와 속대전의 규정 등이 있다.

‘경상도거춘등도류안’은 1894년(고종 31)부터 1895년 3월 사이에 경상도 각지에 정배된 죄인들의 유배안으로 1895년 4월에 경상감영에서 만들었다. 죄인별로 정배지, 죄인의 성명, 도배 연월일, 보인(保人)의 직역과 성명이 기재됐다. 위 두 책은 모두 그동안 이상준씨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등에서 발품을 팔아 얻은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상준씨는 “장기를 거쳐 간 수많은 유배객들은 머물다간 이곳의 풍광과 서정을 주제로 많은 음영과 저술을 남겼다. 포항시와 장기 주민들은 이들이 남긴 자료들 활용해 포항문화관광콘텐츠로 특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면서 “올해 3월 개관된 장기유배문화체험촌에는 우암과 다산의 당시 주거지를 복원하고 고행의 길을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조성돼 있는데 앞으로 이곳에 좀더 다양한 문화시설들이 들어서게 되면 한국의 대표적 문화체험마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 우암 송시열(1607∼1689)은 1675년부터 4년여 간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주자대전차이’와 ‘이정서분류’ 등의 명저를 저술했다. ‘취성도’를 완성했으며, ‘정포은선생신도비문’을 비롯한 많은 양의 시문도 창작해 그 당시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장기를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유향(儒鄕)으로 변화시켰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801년 220여일 동안 장기에 머물렀지만 장기고을 백성들의 생활상과 고을 관리들의 목민행태를 글로 남겼다. 장기농가 10장과 기성잡시 27수, 타맥행 등 130여 수에 달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이아술, 기해방례변, 촌병혹치 등의 서책도 저술했으나 현재는 유실되고 없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