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뿌리, 다른 음식 불고기와 전골

쇠고기는 버섯, 양파 와도 잘 어울린다.

쇠고기에 대한 열망은 강했다. ‘벌’도 무거웠지만 ‘열망’이 벌을 넘었다. “소를 불법 도축하면 사형, 전 재산을 몰수한다”라고 해도 소 불법 도축은 사라지지 않았다. 숙종 시대를 지나며, 소를 도축하는 이들을 부르는 이름이 ‘백정’으로 굳어진다. 그 이전에 사용했던 ‘화척’ ‘양수척’ ‘재우적(宰牛賊, 소 도축하는 도둑)’은 서서히 사라진다. 이민족으로 지냈던 이들이 조선 사회에 동화된다. 원래는 ‘도둑’이라고 불렀다. 우리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백정’은 하층민이지만 조선사람이다. ‘산속에서 모여 살면서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동냥질, 도둑질하던 이민족’이 조선사람이 된 것이다.

소나 짐승을 도축하는 것이 합법적으로 바뀌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조선 말기까지도 민간의 사사로운 소 도축은 금지 사항이었다. 여전히 쇠고기의 이름은 ‘금육(禁肉)’, 먹지 말라고, 법적으로 금하는 고기였다. 법은 있되, 단속이 느슨해졌다. 법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은 것이다.

조선 초기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농사용 소를 도축하여 쇠고기를 먹을 수는 없다. 단속이 엄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8년(1418년)5월의 기록이다.

“(전략) 소경공(昭頃公)이 평소에 쇠고기[牛肉]을 좋아하였으니, 삭망제(朔望祭)에 내가 이를 천신(薦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물건이 심히 크니 가볍게 쓸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혹은 연빈(燕賓)이 있거나 혹은 종묘(宗廟)에 제사할 때 이를 천신하는 것이 어떠할까 한다.(후략)”

채소 샐러드와 쇠고기 구이가 어우러진 식탁.
채소 샐러드와 쇠고기 구이가 어우러진 식탁.

연빈은 중국 사신이다. 종묘 제사는 왕실의 어른을 모시는 것이다. 역시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집권 18년. 태종은 힘이 강한 군주였다. 막내아들이 소경공, 성녕대군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성녕은 열네 살에 죽었다. 삭망제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의 제사다. 귀한 아들의 삭망제에 쇠고기를 사용하지 못한다. 소를 도축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중국 사신, 종묘 제사에 소를 도축한다. 그때 조금 남겨서 소경공의 제사에 쓰자고 말한다. 소, 쇠고기는 이렇게 귀했다.

조선의 1차 성장기는 태조 이성계(1335~1408년)로부터 성종(1457~1494년)까지의 100년간이다. 연산군, 중종 조를 지나면서 불과 100년 후에 임진왜란을 겪는다. 조선의 쇠퇴기다. 임진왜란 후 숙종 조까지 조선은 두 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하나는 전쟁 피해고 나머지는 지구 전체가 겪었던 소빙하기의 대기근이다. 임진왜란의 상처를 치료하기도 전에 병자호란 등 모두 네 번의 큰 전쟁을 겪었고,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 1670~1671년) 등 4대 기근을 이 시기에 겪는다. 숙종 조를 지나며 정조대왕이 돌아가시던 1800년까지 조선은 제2의 르네상스를 맞는다. 숙종, 경종, 영조, 정조의 ‘제2 르네상스’ 시기 쇠고기 문화가 서서히 나타난다.

무명자 윤기(1741~1826년)의 ‘무명자집_시고 제3책_시_시월 초하루의 고사’의 한 구절이다. 무명자는 영조 시절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정조, 순조 등 세 임금을 모셨다. 18세기 중반에 태어나 19세기 초반에 죽었다.

시월 초하루는 길한 날이니/옛 풍속이 또한 볼만했지/예법 있는 가문에선 묘사에 정성 쏟고/부유한 집안에선 난로회 단란하네(富戶煖爐團)

‘난로단(煖爐團)’은 난로를 피워두고 모여 앉는 자리를 말한다. ‘난로회(煖爐會)’ 혹은 ‘난란회(煖暖會)’라고도 한다. 난로회는, “불판을 피우고 둘러앉아 고기를 먹는다”는 게 뼈대다. 당시로는 퍽 호화로운 풍습이었다. ‘무명자 윤기의 난로회’는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의 풍습이다.

난로회는 우리 풍습이 아니다. 송나라에서 시작된 풍습이다. 18세기, 한반도에 새롭게 등장했다. 난로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홍석모(1781∼1857년)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49년)’에 나타난다.

배와 쇠고기를 양념에 버무린 요리.
배와 쇠고기를 양념에 버무린 요리.

18세기 서울, 경기 지역에도 난로회의 풍속이 유행하여 10월 1일이 되면 화로에 숯불을 피우고 번철(燔鐵)을 올려놓은 다음 쇠고기를 기름, 간장, 계란, 파, 마늘, 후춧가루 등으로 양념하여 화롯가에 둘러앉아 구워 먹었다. 또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무, 오이, 채소 나물 등의 야채와 계란을 섞어 전골을 만들어 먹는데 이것을 열구자탕(悅口子湯) 또는 신선로(神仙爐)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시기적으로 18세기라고 못 박았다. 기록은 19세기 중반이지만 난로회의 시기는 18세기다. 숙종, 경종, 영조, 정조가 집권기다. ‘난로회’의 날짜는 10월 1일이다. 음력이니 늦가을, 초겨울이다. 숯불을 피워 놓고 번철(燔鐵)에 고기를 굽는다. 오늘날 같이 가는 석쇠는 드물었다. 번철은 무쇠 솥뚜껑 같은 것이다. 전을 굽는 그릇이라고 전철(煎鐵)이라고도 한다. 기름, 달걀과 여러 가지 양념으로 간을 한다. 여럿이 둘러앉아 먹는다.

“소의 숫자는 유한하니, 화수척, 백정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도축을 하면 언젠가 소의 씨가 마를 것”이라고 절박하게 상소했던 조선 초기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보았다면 기겁할 풍경이다.

난로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국 사행(使行)이 빈번해지면서 새로운 소육(燒肉) 조리법인 난로회가 조선에서 유행하였다”는 내용도 남아 있다. 18-19세기 청나라에서 보았다고 했다. 만주족의 청나라 풍습이라는 뜻이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는 난로회가 ‘송나라 풍습’이라고 못 박았다. 근거도 뚜렷하다. “여원명(呂原明)의 ‘세시잡기(歲時雜記)’와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기록되어 있다. 송나라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세시잡기(歲時雜記)”에 “연경 사람들은 10월 초하룻날에 술을 준비해 놓고 저민 고깃점을 화로 안에 구우면서 둘러앉아 마시며 먹는데 이것을 난로(煖爐)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또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10월 초하루에 유사(有司)들이 난로에 피울 숯을 대궐에 올리고 민간에서는 모두 술을 가져다 놓고 난로회를 갖는다”라고 하였다.

여원명은 여희철(Lü Xizhe, 呂希哲, 1039~1116)로 송나라 관료다. ‘원명(原明)’은 호다. ‘세시잡기’는 송나라의 풍습을 적은 것이다. ‘동경몽화록’의 저자 맹원로(孟元老) 역시 송나라 사람이다. 송(宋) 휘종(徽宗) 2년(1103년) 아버지를 따라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시(開封市)로 왔다. 동경(東京)은 개봉이다. 그 후 금(金)나라의 침입으로 남쪽 지방으로 피난 가서 산다. 여원명이, 자신이 살던 동경, 개봉의 번화함을 추억하며 기록한 것이 ‘동경몽화록’이다.

남녀노소 대부분이 좋아하는 불고기.
남녀노소 대부분이 좋아하는 불고기.

구운 고기, 불고기로 짐작할 수 있는 ‘소육(燒肉)’은 이전 우리 기록에도 있지만, 18세기를 지나며 난로회와 연관되어 수시로 나타난다. 민간, 궁중을 가리지 않고 하나의 풍습이 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년)의 ‘연암집_제3권_공작관문고_만휴당기’의 일부다.

“내가 예전에 작고한 대부(大夫) 김공 술부(金公述夫) 씨와 함께 눈 내리던 날 화로를 마주하고 ‘고기를 구우며 난회(燒肉作煖會)’를 했는데, 속칭 철립위(鐵笠圍)라 부른다. 온 방안이 연기로 후끈하고, 파, 마늘 냄새와 고기 누린내가 몸에 배었다. (후략)”

연암이 대단한 부호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난로회는 가능했다. 민간에 널리 퍼졌다는 뜻이다. 난로회는 ‘난란회’ ‘난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소육(燒肉)’은 고기를 굽는다는 뜻이다. 일본인들이 ‘야키니쿠’라고 부른 것이다. 우리의 불고기가 일본 야키니쿠에서 시작되었다, 아니다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조선 시대 여러 기록에 ‘소육’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부르는 이름이야 어떻든, 고기를 굽는 것, 불고기는 일제강점기 훨씬 전에 있었다. 특히 파, 마늘, 기름, 후춧가루 등을 양념으로 사용한, 오늘날의 불고기와 비슷한 것들도 유행했다.

‘철립위(鐵笠圍)’라는 표현도 재미있다. ‘철립’은 쇠로 만든 군사들의 모자다. 모직 등 천으로 만들면 ‘벙거지모자(氈笠, 전립)’다. 철립위는 철립의 테두리에 고기를 굽는다고 붙인 이름이다. ‘전립투(氈笠套)’는 쇠로 만든 전골냄비다.

철립위는 아래로 움푹한 그릇이다. 마치 전립, 벙거지모자를 뒤집어 놓은 것 같다. 둥근 테두리에 고기 놓고 굽는다. 움푹한 곳에는 각종 채소, 양념 등을 넣고 끓인다. 테두리의 고기가 익으면, 움푹한 곳의 국물에 찍어 먹는다. 석쇠나 번철이 아니라 벙거지모자 뒤집은 것 같다. 어느 순간, 고기와 채소, 양념을 벙거지모자 같이 생긴 ‘전립투(전골냄비)’에 섞어 넣고 끓였다. 섞는 것은 ‘골(骨)’이다. 비빔밥을 ‘골동반(骨董飯)’이라 부른다. ‘전립투+골’이다. 전립투골을 줄여서 전골(氈骨)이라 부른다. ‘전립투골’은 ‘전립골’ 혹은 ‘벙거짓골’이라고도 불렀다. 역시 전골이다. 불고기[燒肉, 소육]는 철립의 테두리에 고기를 구워서 중간 움푹한 곳의 장물에 찍어 먹는 구조다. 전골은 움푹한 곳에 모든 식재료를 다 넣고 끓여 먹는 음식이다. 입을 즐겁게 한다고 열구자탕(悅口子湯) 혹은 신선로라고 부른다고 했다. 불고기와 전골은 다른 음식이지만 같은 뿌리에서 시작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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