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만든 경북여성 (1)
최고 훈장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上)

남자현생가.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여성 독립운동가 중 유일하게 건국공로훈장 최고훈장(대통령장)을 받은 남자현, 전 재산을 육영사업에 투자한 최송설당, 기생에서 여성운동가로 변모한 정칠성, 최초의 서양음악가 추애경, 현대가사문학의 선구자 조애영,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첫 신춘문예 등단 작가 백신애…. 
경북의 여성은 특별했다. 특유의 인내와 저력으로 한 가문을 일으키고 마을을 살리며 국난 시에는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서기도 했지만 그 이름은 기억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쉽게 사라져갔다. 
경북매일은 2019년 양성평등주간(7월 1일~7일)을 맞이해 여성이라는 제약과 가부장제가 뿌리 깊은 경북지역에서, 일제강점기와 전쟁, 가난, 정치적 혼동의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냈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며 진취적인 자세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 경북여성인물 7명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시대를 앞서 전인미답의 길을 걸어갔던 선구적 경북여성들의 삶의 기록들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의 여정에 보다 주체적인 인간으로의 길이 되고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19세에 김영주와 혼인
유복자 기르며 시부모 봉양하다
3·1독립 운동 후 서로군정서 몸담아
청산리 전투 참여 독립군 간호

1962년 3월 1일, 정부는 독립유공자 58명에게 건국공로훈장 복장(제도 개편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다. 이봉창·신채호 등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이 포함됐는데, 이들과 함께 최고의 훈장을 받은 여성이 한 명 있었다.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며 의열투쟁으로 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남자현 지사가 바로 그녀다. 남자현은 전통적인 규범 속에서 성장한‘구여성’이었다. 그러나 당당히 그 껍질을 벗고, 46세의 나이에 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고, 그 뒤 14년 동안 만주에서 조국광복에 헌신했다. 그녀는 독립운동사에서 보기 드문 열혈투쟁가다.

 

 

△운명에 맞서 만주로 망명하다

남자현(南慈賢·1873∼1933)은 1873년 통정대부 남정한과 이씨부인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393-6번지(석보로 204)다. 남자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해 일곱 살에 이미 한글과 한문을 터득하고 14세에는 사서(四書)를 독파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성장해 19세가 되던 1891년, 남자현은 같은 마을에 사는 김영주(金永周)와 혼인했다. 남편의 본적지는 안동시 일직면 귀미동이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1896년 의병항쟁에 나섰던 남편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남편 김영주는 1896년 7월 11일 당시 오십천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한다.

남자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남자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이때 겨우 24세의 남자현은 첫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 태어난 유복자를 기르며,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효부로 이름나 진보군 진보면에서 효부상을 받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이 무렵의 남자현은 겉으로는 다른 보통의 여인들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은 그녀에게‘국권회복’이라는 큰 과제를 던져줬기에 그녀의 가슴에는‘남편의 원수! 나라의 적! 일본’을 향한 큰 불덩이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07년에는 급기야 대한제국의 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마저 해산되고 말았다. 이 무렵 남자현의 친정아버지 남정한은 의병항쟁에 나섰고, 남자현이 이를 적극 지지했다고 전한다. 이어 1910년 나라는 기어이 무너졌고, 이는 남자현의 인생에도 큰 전환점이 됐다. 그녀는 1913년 무렵부터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무너진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태고자 했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13년부터 최영호·채찬(백광운)·이하진·남성노·서석진·권모 등과 연락하며 활동을 시작했고, 그 뒤 5년 동안 국내조직에 참가했다. 최호와 채찬은 당시 모두 만주에서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국내공작을 펼치는 과정에서 남자현과 연결됐을 가능성이 크다. 채찬의 주요 활동무대는 서간도였고, 백서농장에도 참가했다. 백서농장은 안동출신 김동삼이 장주로 활약하면서 독립군을 기르던 병영이었다.

남자현 지사 항일순국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남자현 지사 항일순국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그 뒤 47세가 되던 1919년 2월말 남자현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아들 김성삼의 회고에 따르면 서울 남대문통에 살던 김씨부인의 편지를 받고 상경했다고 한다. 서울로 온 남자현은 연희전문학교 근처의 한 교회에서 김씨부인을 비롯한 교회신자들과 3·1운동에 참여했다. 남자현은 열흘 남짓 서울에서 활동했다가 3월 9일 만주로 향했다. 만주에서 남자현의 자취가 처음 드러난 곳은 통화현이다. 그곳 미동 김기주의 집에 아들을 맡겨두고 그녀는 본격적인 활동무대를 찾아 나섰다.

이 무렵의 만주는 희망의 물결로 일렁였다. 잇따른 독립선언과 불길처럼 일어난 3·1독립만세. 이는 한국이 독립국이요 한국인이 자주민임을 세계 만방에 천명한 것이었다. 3·1독립선언뒤 많은 청년들이 만주로 들어왔다. 이에 만주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은 늘어나는 망명인들을 추스르고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신흥무관학교를 확대 개편하는 한편 자치단체 한족회를 꾸리고, 독립군단 서로군정서를 만들었다. 남자현이 처음 몸을 담은 곳은 바로 이 서로군정서로 보인다. 이어 청산리전투에 참여해 독립군을 간호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 뒤 남자현은 활동무대를 북간도로 옮겨 주로 교회를 중심으로 여성교육에 나섰다. 50세가 되던 1920년대 중반까지 교회를 설립하고, 여자교육회를 조직했으며, 순회강연을 통해 여성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데 온 힘을 쏟았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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