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모의 미술사 기행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의 유리외벽, /bauhaus-dessau

독일 베를린에서 남동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한적한 마을 데사우(Dessau). 이곳에는 현대건축의 선구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세운 종합예술학교 ‘바우하우스’(Bauhaus)가 자리하고 있다. 바우하우스 건물의 모든 외벽은 유리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이야 전면 유리 파사드가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1926년 바우하우스 건물이 처음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혁신적인 건축언어였다.
 

마흔 세 살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는 기술과 예술을
하나로 엮어 새로운 산업적 미학을
창조하고자 바우하우스 운동을 일으켰다
지금 우리가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작이 바로 그로피우스가 주창한
바우하우스이다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은 그 자체가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담고 있는 기념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1926년 12월 4일 바우하우스 건물의 준공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데사우를 방문했고 이들은 현대 건축디자인의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도시에 어둠이 내려앉자 바우하우스 건물에 불이 켜지면서 장관이 펼쳐졌다. 격자 모양의 구조가 선명히 드러나고 유리 파사드가 빛을 뿜어내면서 지금까지 본적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유전자의 건축물이 탄생한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짓다’는 단어 ‘Bauen’(바우엔)과 ‘집’을 뜻하는 ‘Haus’(하우스)의 합성어이다. 바우하우스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19년 독일의 바이마르(Weimar)이다. 마흔 세 살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는 기술과 예술을 하나로 엮어 새로운 산업적 미학을 창조하고자 바우하우스 운동을 일으켰다. 지금 우리가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작이 바로 그로피우스가 주창한 바우하우스이다. 바이마르의 평범한 공공건물에서 시작된 바우하우스 예술학교에서는 미술뿐만 아니라 금속가공, 목공 등 공예와 관련된 전 분야는 물론 공연과 무용에 이르는 모든 예술 교육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졌다.

추상미술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가 색채 교육을 책임지면서 순수 미술에서 추구했던 미학이 일상에서 사용되는 가전이나 가구에 접목되었다. 교수와 학생들에게는 창작을 위한 충분한 자유가 주어졌고 수많은 실험들이 어떠한 제도적 방해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바이마르에서 순탄하게 시작된 바우하우스는 1925년 위기를 맞이한다. 그해 바이마르 시의 정권을 잡은 극우정당은 학교를 폐교할 목적으로 재정 지원에 대한 전면 중단을 결정하였고 바우하우스는 불가피하게 이전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과 기술을 접목해 일상의 물건이나 심지어 기계마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새로운 산업 미학을 만들어낸 바우하우스. 1919년 독일의 역사적인 도시 바이마르에서 처음 문을 열었던 바우하우스는 극우정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재정 지원이 끊겨버렸고 존폐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도시 데사우로 그 자리를 옮기게 된다. 당시 데사우는 독일 산업의 전진기지로 도시의 정체성이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재정적 지원은 물론 학교 건축을 위한 넉넉한 부지도 기꺼이 마련해 주면서 그로피우스의 종합예술학교 이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데사우 시당국이 그로피우스에게 학교 부지로 제안한 곳은 도심에서 벗어난 넓은 벌판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제약 없이 건축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는 바우하우스의 작업실 공간.  /bauhaus-dessau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는 바우하우스의 작업실 공간. /bauhaus-dessau

그로피우스는 새로운 터에 자리하게 될 예술학교를 설계하면서 바우하우스의 이념에 따라 각 공간들이 독립적으로 기능하지만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통합적인 건축을 소개한다. 그 시대에 유행하던 건축 양식이나 형태에 구애를 받지 않고 쓰임에 적합하지만 자유롭고 통합적인 구조로 공간들을 배치하였다. 학교는 미술학교를 위한 건물은 물론 기술학교, 사무공간, 식당과 기숙사 등의 부속 건물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로피우스는 각각의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통일성은 보여주되 지루하지 않도록 대칭적 구조를 피하고 크기와 높이에 변주를 가했다. 그렇다보니 바우하우스 건축물의 전체 구조는 여느 건축물들과는 달리 좀처럼 한 눈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건축물들은 구조적으로 대개 연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외부에서 내부를, 하나의 공간에서 다음 공간을, 부분에서 전체를 읽어 낼 수 있다. 그런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건물은 그렇지 않다. 학교를 구성하는 개별 건물들은 형태뿐만 아니라 크기나 구조 또한 모두 달랐기 때문에 외관의 피상적인 관찰을 통해 내부를 읽을 수 없고, 부분을 통해 전체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바우하우스의 건축 구조와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직접 걸어 다니며 공간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바우하우스를 건축하면서 그로피우스의 고집이 강하게 드러난 부분은 디자인이다. 바우하우스의 기본적인 건축철학은 ‘집과 가구는 조화를 이루어야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에 따라 문고리를 비롯해 전등이나 심지어 전기 스위치와 같은 소소한 대상들까지도 건물 전체 디자인에 맞게 세심하게 제작되었다. 바우하우스에 사용될 조명들은 재학생들에 의해 직접 제작되었다. 각 층과 공간은 그 용도와 성격에 따라 다른 색으로 칠해졌다. 이렇게 기능성과 효율성을 유지하면서 미적 감각까지 더해 진 바우하우스 건물이 탄생한 것이다.

1933년 나치가 데사우 시의회를 장악하면서 바우하우스는 다시 한 번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바우하우스는 베를린에서 다시 문을 열었지만 나치의 탄압에 위협을 느낀 발터 그로피우스는 이듬해인 1934년 영국으로 망명해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대학원장을 역임하면서 현대건축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바우하우스가 베를린으로 이전해 버리고 데사우의 건물은 그대로 방치되고 말았다. 나치는 바우하우스 건물을 ‘역겨운 건축’이라고 폄하한다. 1945년 폭격으로 건물 일부가 파괴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데사우는 동독에 편입이 되었다. 동독 정부는 바우하우스 건물을 독일 건축의 전통을 파괴하는 흉물로 취급했지만 완전히 철거를 하지는 않았다. 20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 동독 내 정치적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1976년 바우하우스는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동서로 나누어진 독일이 다시 통일을 이루고 바우하우스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일부는 학교로 일부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 그는 ‘예술은 탐구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탐구는 발견을, 발견은 창조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창조가 탐구에서 비롯된다면 그 토양이 되는 것은 ‘자유’이다. 시대를 움직이는 진정한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자유, 행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통해 남기고 간 위대한 예술정신도 역시 자유이다.

/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