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어교육과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어교육과

얼마 전의 일이다. 서로 살기 바빠 한동안 보지 못했던 지인 한 명이, 간만에 대구에 들를 일이 있다며 차나 한잔 하자고 불러내었다. 오랜 만에 보았는데 대뜸 한다는 이야기가, 그 동안 지극정성으로 사랑한 남편이, 다른 여자가 생겨서 떠나가겠다고 선포를 하더라는 것이다. 애를 셋이나 낳아 애지중지 키웠더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냐며, 먹고 살만하니 그런다고 기가 막힌다며 하소연하던 그 앞에서, 나는 유자차 한 잔을 들이키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고 살거라.”

신경숙의 소설 ‘깊은 슬픔’에 나오는 구절이다. 한때, 사랑으로 인해 아파하고 슬퍼하던 많은 청춘들의 심금을 울렸던 이 문구. 사랑하면 잡아둘 법한데, 왜 떠나보내라고 하는 것일까?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옛 고전 시가에도, ‘떠나감’을 받아들이지 못한 예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떠나는 임을 향해 적극 매달리며 잡으려는 여성(‘서경별곡’), 서러운 마음 꾹 누르며 보내니, 가는 듯 다시 돌아오라며 여운을 남기는 여성(‘가시리’), 술에 취해 물에 빠져 죽는 남편 따라 같이 죽는 여성(‘공무도하가’), 자신의 유혹을 거절한 채 갈 길 떠나는 남성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는 여성(‘맏딸애기 노래’) 등.

이는 비단 여성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니요, 남녀 간의 문제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사실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친구 사이 등 인간만사가 모두 떠나감-남겨짐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떠나감이 있으면 다가옴이 있고, 다가옴이 있다면 떠나감도 있는 법이다. 애초에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오롯이 내 것이기만 한 것이 어디 있었던가. 살면서 잠시 ‘내 것’이 되었던 것일 뿐. 죄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잠깐 ‘빌린 것’들일 뿐이지 않는가 말이다. 인생사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인 것을. 헌데, 그것을 ‘내 것’이라 여기고 집착하고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룬다면, 이는 잠시 ‘빌린 것’에 스스로를 가두는 꼴이 아니고 무엇일까? 옛 여류 수필가 중, 1769년(영조 45년) 10월 13일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김삼의당 부인이 있다. 그는 2살배기 셋째 딸을 잃어버리고 쓴 제문(‘哭第三女文’)에, 이렇게 적었다. ‘생이든 죽음이든 사람이 다 한번은 겪는 것이다. 수명이나 천명은 사람이 반드시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바이다. 대저 어찌하여 살면 기쁨이요, 죽으면 슬픔이 되는가.’라고. 그리하여 ‘나는 너의 죽음을 애석해 하지 않고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딸의 죽음 앞에서 이토록이나 담담하게 슬픔을 풀어낼 엄마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김 부인이 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많은 정이 쌓인 후 어느 날 아침 죽는다면 더욱더 아플 것이니 차라리 그 전에 죽어버린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역설을 통해, ‘떠나감’에 집착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보여준다. 누군가가 우리를 떠난다는 것은, 결코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다림’과 ‘절망’, ‘아픔’과 ‘슬픔’, ‘고통’과 같은 지독한 감정들을 겪고 난 후에 찾아오는 평온함, 그 속에서 ‘비움’을 채워갈 시간이 주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떠나감’의 핵심은, ‘떠나가는 주체’가 남겨진 자의 가슴팍에 아로새기는 상흔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내는 주체’가 타자의 ‘떠나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간 스스로 집착하고 있던 것들을 떠나보내는 연습에 있다. 그 연습이야말로 다름 아닌, ‘떠나감’의 진정한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연습 과정은 비록 뼈를 깎는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할 지라도, 종국에는 스스로의 영혼을 성숙시키는 과정이자 언젠가 떠나간 빈자리를 채울 ‘새로움’을 위한 준비기간일 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