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한인들의 연해주 이민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다. 1863년 함경도 무산 최운보 등 13가구가 크라스키노로 집단 이주한 것이 최초 이민이다. 연해주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애국지사들의 망명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상설, 최재형, 안중근, 홍범도, 문창범 등은 이곳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름 없이 죽어간 지사들도 상당히 많다. 조선에서 온 이주민들은 초기에 포시에트 부근 지신허(地新墟)에 첫 정착지를 마련하였다. 후일 이들은 우수리스크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진출하여 1930년대에는 이주민이 20여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신한촌을 중심으로 학교와 신문사를 세우고 권업회를 결성하여 삶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이 때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연해주의 고려인을 중앙아시아에로의 집단이주 계획을 세운다. 연해주 고려인들의 ‘일본첩자’ 활동을 미리 막고, 그들의 ‘자치권 요구’를 사전 차단한다는 명분이었다. 스탈린은 소련 인민위원회 결정 No. 1647-377cc호에 의해 1937년 10월 연해주의 고려인 17만2천여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켜 버렸다. 사전 예고도 없이 3∼7일 전에 통보만 하고 며칠 분 식량만 휴대시켜 화물 열차에 짐짝처럼 실었다. 이 무자비한 음모를 위해 고려인 약 2천500여 명을 사전 검속하여 ‘반혁명’ 분자로 몰아 처형하였다. 이에 한 달 간 이송 도중 1천500명의 조선인이 죽어 나갔지만 그들은 승차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조선인들은 그해 11월 겨울 칼바람과 배고픔 속에 중앙아시아의 낯선 땅에서 하차당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황무지에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억새와 잡초만 무성한 황무지에 흩뿌려진 이들의 고통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이를 악물고 새로운 땅을 개간하였다. 그들은 ‘고본질’이라는 특유의 협동농업을 통해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다행히 우즈벡 불멸의 ‘노력 영웅’ 김병화와 같은 걸출의 인물도 탄생하였다. 이들 고려인 3세 중에는 법조인, 교수 등 성공한 사람도 더러 있지만 아직도 고통의 세월을 보내는 사람도 많다.

1937년 스탈린 정권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은 그 정당성을 찾기 어렵다. 그들이 내세운 조선인의 ‘일본 첩자설’이나 ‘자치요구설’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 당시 연해주 고려인 대부분은 조선 땅에서 살기 힘들어 이주한 생계형 이민자들이었다.

이들은 항일 투쟁에 앞장선 조선독립운동가들의 뜻에 따라 일본 첩자 역할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오히려 이들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조국의 광복에 힘을 기울였을 뿐이다. 또한 당시 연해주 고려인들은 러시아의 유대인처럼 자치권을 요구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결국 강제 이주는 스탈린 정권의 잘못되고 무자비한 정책 결정의 결과일 뿐이다. 차라리 소련은 중앙아시아 황무지 개발에 농사 잘 짓는 조선인이 필요했다고 고백하고 사죄를 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소련 당국의 입장은 많이 달라졌다. 흐루시초프는 1955년 고려인들의 법적 정치적 명예회복을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소연방이 해체된 후 러시아 당국은 1992년 ‘고려인 강제이주 백서’까지 출판하였다. 이는 후일 러시아연방 최고회의 민족문제협의회가 소련 시기에 탄압받았던 민족들의 복권에 관한 조사 활동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결과 한·러 수교 후 1993년 러시아 고려인의 복권에 관한 법령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조선인들의 강제 이주가 잘못이며 그들의 명예는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늦으나마 다행한 일지만 그것이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들의 원한을 달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 분산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명예뿐 아니라 실질적 보상책도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이 요구되며, 남북한이 힘을 합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