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6월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한 호국보훈의 달이다.

1950년 6월 25일 남한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이 자행됨으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군인 26만 명과 민간인 100여 만 명의 희생자가 생겨난 민족의 대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3년 동안 치열하게 펼쳐진 전투와 고단했던 피난민들의 삶은 현대사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민족 간 아픔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의 화가들은 좌·우익으로 구분되어지는 이념적 분쟁에서 오는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다채로운 이념 활동과 종군활동을 통해 나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하지만 한국전쟁 60여 년이 지나도록 정부는 종군화가단의 규모와 활동, 그리고 명단에 대해 정확한 자료를 아직까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종군화가들의 주 활동 무대였던 대구의 행적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필자는 한국전쟁 중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종군화가들의 활동을 부분적으로 살펴본다.

전쟁 중 그림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군인과 민간인 사기앙양을 담당했던 ‘종군화가단’ 창설에 관한 논의는 1950년 9·28 수복 후 대한미술협회 위원장 고희동과 부위원장 장발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때 정훈국 미술대 소속 화가들이 이미 전쟁에서 활발한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종군화가단은 1951년 1·4 후퇴 때 대구에서 본격적으로 결성되기 시작했다. 1951년 2월 국방부 정훈 국장이었던 이선근과 육군대위였던 최일에 의해 결성되어, 중진급 화가 10여 명이 참가했다.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는 1951년 5월경 대구 아담다방에서 육군 정훈감 박영준 중령의 주선으로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육군 ‘종군작가단’을 발족했으며, 단장 최상범과 부단장 김송을 비롯해 정비석, 방기환 등 수십 명이 참가했다. 그런데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 펴낸 자료에서는 동양화, 서양화, 조각, 선전미술 부분에 속했던 미술가들의 인명을 열거하였다. 이들 명단은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과 겹쳐지는 내용이다. ‘공군미술대’는 공군본부 작전부 소속으로 1950년 11월 서울에서 창설하여 초대 대장으로 장발을 선임했지만, 1·4후퇴 때 그가 미국으로 가버리자 백문기가 대장 역할을 맡았다고 전한다. 당시 공군본부는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연극분야도 같은 성격의 조직을 결성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하며 공군을 따라 대구로 내려온 미술가들은 백문기를 비롯해 부대장인 정창섭과 대원으로는 장운상, 권영우 등이 서울미대 재학생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대구에서 1950년 5월 문총경북지부결성준비위원회가 발족되어 이윤수가 위원장이 되어 지부결성을 추진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이내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7월 문총구국대 경북총조직위원회가 구성되고 대구문화극장(한일극장)에서 문총구국대경북지대를 결성해 지대장에 이효상을 추대하고 이윤수, 김진태, 최계복, 백락종 등이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8월에는 중앙문총구국대와 문총구국대경북지대가 합류해 경북지대 주최로 8·15 기념행사를 만경관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대구는 한국미술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곳이기도 하며, 한국전쟁 중 한시적이었지만 임시수도와 피난지로서 우리나라의 주요 작가들이 삶을 영위했던 터전이었다. 더불어 피난 온 미술인들과 지역 화가들은 백척간두에 놓인 조국을 지키기 위한 구국정신으로 종군과 선전활동을 활발히 펼치기도 했다. 호국의 달을 맞아 조국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