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별아의 신라정신의 원류와 본질을 찾아서

지금 월성은 없다. 흔적과 터만 남아있을 뿐 실체는 시간의 안개 저편에 있다. 월성의 최후에 대해서도 견훤이 불을 놓았다는 기록과 몽골 기병이 황룡사를 태웠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아무래도 신라 패망 후 방치되다가 화재로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전화위복이요 새옹지마라 할 만하다. 추정대로 월성이 몽골이 침입했을 때 화재에 의해 일시에 사라진 것이라면 오히려 현재까지 땅속에 상당한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1970년대 말 월성 내부 시험 발굴에 나섰다가 지하에 너무 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어 당시 기술로는 도저히 발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대로 덮어버렸다”는 말이 경주 지역 문화재 관계자들 사이에 전설처럼 내려왔다니. 월성은 이제부터 차근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비밀과 신비도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을지니, 마음의 눈을 뜨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할 테다.

매일 짐을 풀고 싸는 대신 한곳에서 머물며 여행하다 보면 시나브로 그 동네의 특성을 파악하고 ‘로컬’의 분위기에 젖게 된다. 경주에서 유식하며 월성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닥치는 쫓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유물과 유적보다는 사람, 지난 시간 속의 사람들과 현재의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월성은 결국 사람이 지은 성이고, 사람이 살았던 성이다. 월성의 주인이 누구보다 중요하지만 그들과 어우러져 살았던 월성 바깥의 사람들도 무시할 수 없다. 신분과 처지는 달랐을지언정 그들 모두 자기의 운명을 힘껏 살았던 사람들이다. 너무 땅속만 들여다보고 지난날만 더듬으면 허무감이 깃들기 마련이다. 어제로부터 오늘까지, 어떤 환란에도 영영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의 향기를 쫓아본다.

21세기에 들어 처음 실시한 2000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본관별 인구 순위 1위는 김해(가락) 김씨, 2위는 밀양(밀성) 박씨, 3위는 전주 이씨라고 한다. 그리고 4위부터 6위까지가 바로 경주를 본관으로 한 김씨, 이씨, 최씨의 순이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시조이고 김유신이 중시조인 김해 김씨까지 포함하면 인구수 상위 성씨의 절반 이상이 신라를 뿌리로 하는 셈이다.

물론 지금의 본관이며 성씨가 삼국시대를 비롯한 과거와 같은 의미일 수는 없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성씨 자체가 없었다가 이후 일부 계급에게만 주어졌다. 포상이거나 표식의 의미가 더 강했던 본관과 성씨는 계급 사회의 변동에 따라 ‘만인의 것’이 되었지만, 그 또한 부계의 전승으로서 핏줄로만 따지면 절반의 징표에 불과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이 시작되었을 뿐더러 법제까지도 부계 성씨 계승 대신 부모의 성씨 중의 선택으로 변화하려는 즈음에, 새삼 본관 따지고 성씨 따지는 것이 고리탑탑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뿌리 찾기’에 흥미를 느끼는 편이다. 고구마줄기처럼 혈연으로 이어진 나의 뿌리가 과연 어디에 닿아있는지 궁금하다. 그것은 지나간 일로만 여기는 과거를 현재의 일부로 인식하고 회복하는 작업이다. 내가 흘러왔고 흘러갈 물에 가만히 손을 넣어보는 일이라 할까.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안 호수가 178,936호(戶)에 1,360방(坊)이요, 주위가 55리(里)였다”고 했다. ‘17만 호’에 대해서는 이를 호구수로 보고 5(명)을 곱하면 85만여 명이 되는데 경주의 면적을 감안하면 이 인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호구수로 보지 않고 인구수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이병도,1959).

그러나 ‘당평백제비(唐平百濟碑)’에서 백제 멸망 당시 인구가 620만이라고 언급한 점을 감안하면, 신라 왕경의 인구를 85만명 정도로 추측하는 것이 결코 타당성 없는 주장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이기봉,2002).

족보 전문사이트 ‘뿌리를 찾아서’에서 검색되는 경주(혹은 안강, 월성, 계림)를 본관으로 한 성씨는 89개에 이른다. 그중 ‘월성의 시대’에 있었던 성씨는 9개쯤으로 짐작된다. 우선은 왕을 배출한 박·석·김씨가 있고, 고조선 유민으로 진한 땅에 자리 잡은 6부 촌장들을 원조로 하는 알천 양산촌 이씨, 돌산 고허촌 최씨, 취산 진지촌 정(鄭)씨, 무산 대수촌 손씨, 금산 가리촌 배씨, 명활산 고야촌 설씨 등이 있다.

경주시 탑동 양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양산재’는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1970년에 6촌장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는데, 가보니 문이 잠겨 있고 주변은 썰렁하다. 대문 틈으로 빼꼼 들여다보니 깔끔하게 정비된 모습에서 후손들의 손길을 느껴진다.

양산재에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바로 아래 나정에서 달랜다. 나정과 양산재가 이어지다시피 자리한 것이 당연하지만 흐뭇하다.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를 신라의 왕으로 추대한 이들이 바로 6부 촌장이다. 원래 이들은 각자 자식들을 데리고 알천언덕에 모였다. 자기 자식을 왕으로 세우고픈 마음이(본능이) 없지 않았으련만, 그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꾹 누르고 혁거세를 지도자로 옹립한다. 마음 맑고 눈 밝은 이들이 알아보지 못한다면 영웅이고 위인이고 없는 것이다. 6부 촌장 중에서도 두 사람의 이야기가 도드라진다. 촌장들의 리더 역할을 했던 고허촌장 소벌도리와, 그 또한 하늘에서 바위로 내려왔다는 표암(瓢-) 전설의 주인공 양산촌장 알평이다. 경주 최씨와 경주 이씨의 성을 가진 그들의 자손은 호부견자 없다는 말을 증명하듯 명문가를 일구어왔다.

월성의 서편, 월정교를 보러 온 관광객들과 주차장을 같이 쓰는 교동마을은 경주 최씨 후손들의 삶터다. 일명 ‘최부잣집’으로 알려진 고택을 중심으로 한옥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달걀이 가득 든 ‘교리김밥’도 유명하다. 고택 사랑채의 주춧돌이 월성에서 나온 돌이라는데, 이 돌이 그 돌 같고 그 돌이 이 돌 같아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시간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진정은 마을 한편 향교에서도 느껴진다. 경북에서 가장 큰 향교라는 것 외에도 원래 신문왕이 ‘국학’을 지은 바로 그 자리에 세웠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학교의 자리에 학교가 생겨나는 건 그곳이 가장 공부하기 좋은, 조용하고 안정적인 터라는 뜻이렷다.

경주 이씨가 이씨의 대종(大宗)으로서 수많은 공신과 학자를 배출한 것을 자랑삼는다면, 경주 최씨는 ‘최부잣집’으로 대표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단순히 돈만 많은 게 아니라 세계관과 인생관이 함께했기에 경주 최씨는 일제강점기에 지사들을 배출하며 진정한 명문가로 거듭난다. 벌써 몇 번째 방문했지만 최씨 집안의 가훈은 볼 때마다 깊은 울림을 준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는 분쟁에 휘말려 화를 집안으로 불러올 수 있다.

2.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

-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1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에 돌려 사회에 환원한다.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낸다.

4.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

- 흉년에 먹을 게 없어서 남들이 싼값에 내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케 해서는 안 된다.

5.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6.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라.

그 땅의 지기(地氣)는 결국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운이다. 땅이 사람을 닮고, 사람이 땅을 닮는다. 경주에 머물며 여행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연구자와 작업자 등 월성 발굴조사에 참여하는 분들과의 인터뷰도 그랬지만, 일상적으로 길이나 유적지나 식당이나 택시에서 만나는 ‘경주 사람’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 고향도 관광지라면 관광지라 할 수 있는 해변 도시인데, 우리 동네 사람들은 아무래도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편이다. 고향사람들끼리야 거친 말투와 태도 이면의 정서를 이해하지만, 타지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친절하고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다.

경주는 오래된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친절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물론 내가 운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 자신들의 터전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뜨내기’이거나 ‘호구’로 여겨서는 보일 수 없는 태도다. 시장의 상인부터 게스트하우스의 주인까지 물으면 정성껏 답해주고 무어라도 도와주려고 애를 쓴다.

무엇보다 놀랍고 감동적인 부분은, 고도(古都)의 주인답게 품격과 지성을 지닌 분들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주에서는 흥미가 있고 마음만 먹으면 무료이거나 최소한의 경비만으로 참여할 수 있는 탐방과 체험 프로그램이 연일 이어진다. 단체를 운영하는 데는 지자체의 보조를 받겠지만, 거의 자원봉사나 다름없이 활동하며 경주와 신라를 알리는 문화 해설사들도 많이 만날 수 있다.

남산 삼릉코스를 이끌며 구석구석 숨은 보물들을 가려보여준 ‘경주남산연구소’의 김원자님은, 견훤에 의해 즉위해 마침내 고려에 투항한 ‘경순왕’을 신라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꼬박꼬박 ‘김부’라고 부르는 자존심과 결기가 인상적이었다. 쪽샘 유적 발굴관에서 신라 고분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신 ‘신라문화원’의 박근자님은, 황룡사지에서 태어났다는 내력으로 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조근조근 작은 목소리와 반짝반짝 빛나는 눈은 참으로 ‘신라인’다웠다. 자원봉사도 시간과 건강이 허락되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문화재 해설은 그에 더한 열정이 없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폐허에서 폐허 너머를 보는 상상력이 아니고서야 공허한 일일 수밖에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당연한 이치에 하나를 더 얹는다. ‘상상한 만큼 느낀다.’ 그리고 ‘사랑하는 만큼 기억한다’고.

월성을 걷는 시간은 신라를 기억하며 경주를 여행하는 시간인 동시에 ‘신라의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들이 있어 서라벌, 그리고 월성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