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조리스 위스망스는 소설 ‘거꾸로’(1884)에서 격절된 공간 ‘테바이드’를 찾아 나서는 염세주의자 제쎙트를 그려낸다. 주인공이 세상과 작별하고 고독과 은둔의 공간을 찾으려는 근저에는 쇼펜하우어의 명제가 자리한다. “지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정녕 비참한 일이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하인들과 함께하는 시공간마저 최소화하는 제쎙트. 19세기 후반 프랑스 세습귀족의 후예가 절대고독을 추구한 배후는 무엇인가.

급속도로 진행된 산업화와 자본주의, 제정과 공화정을 줄타기하는 정치체제,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몰락과 부르주아의 대두. 사회-정치적인 양상의 변화가 재촉한 시대풍조를 위스망스는 각박한 실용주의와 어리석은 감상주의(感傷主義)로 규정한다. 그는 귀족의 자리를 꿰찬 부르주아가 초래한 재능의 압살, 정직의 부정, 예술의 죽음을 애도한다. 제쎙트는 절규한다. “무너져라, 사회여! 제발 죽어라, 낡은 세계여!”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든다. 퇴폐와 타락, 방종과 지적 유희와 쾌락의 세계다. 일반대중은 물론 교육받은 부르주아도 엄두 내지 못할 도저한 경지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제쎙트. 그의 자발적인 소외와 칩거는 납득할 만하다. 30세 창백한 지식인이자 귀족인 그가 세상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전무 하기 때문이다. 염세주의와 이른 조락(凋落)으로 세상과 절연하고 싶은 주인공.

21세기 세계는 개인을 홀로의 시공간에 방치하지 않는다. 똑똑한 전화기가 선사하는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의 범지구적인 광통신은 빛처럼 빠른 속도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국가, 인간과 대륙을 연결한다. 언젠가 우리는 우주의 소리나 통신과 만날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크고 작은 외침과 깃발과 구호와 열망이 불타오른다. 어디서나 갈등과 대결이 피처럼 선명하다.

끝없는 갈등과 대결은 개인과 사회와 공동체를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다. 인간이 지상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의 근원을 붓다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라 갈파했다. 일컬어 ‘탐진치 (貪瞋痴)’ 삼독(三毒)이라 한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욕망을 제거하면 식물인간이 된다. 우리 모두 욕망의 수인(囚人)으로 살아간다.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까지 우리는 욕망한다. 문제는 그것이 욕망을 넘어 탐욕(貪慾)의 지경에 도달하는 것이다.

돈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지나치게 욕망하면 탐욕이 된다. 이른바 ‘사로잡힌’ 인간, ‘귀신에 씌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탐욕에 사로잡히면 인간은 쉽게 분노하고 몹시 어리석어진다. 탐하는 것을 끝내 얻지 못하면 강력한 분노가 화산처럼 불끈 폭발하기 때문이다. 분노하는 인간은 관계와 사물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어리석음의 노예로 전락한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인간의 분노와 어리석음의 진원지는 탐욕이다.

붓다는 삼독에서 생로병사 수비뇌고(愁悲惱苦)가 생겨난다고 가섭 형제에게 설했다.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공자는 네 가지를 하지 않은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무의 무필 무고 무아!’ 일컬어 ‘절사(絶四)’라 한다. “넘겨짚지 아니하고, 꼭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으며, 고집하지 않고, 나만 옳다고 내세우지 않는다.” 혼란한 춘추시대를 살았던 중니의 인생관이다. 모두가 함께하는 공동체주의를 실천한 것이다.

세상의 갈등과 투쟁과 혼란과 아수라판을 만드는 것은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지식인 집단이다. 제 앞가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국익이니 국민의 알권리니 운운하며 사리사욕과 붕당의 이익에 급급하다. 이제 됐으니 국회로 돌아가 백성의 고단한 삶을 돌아보고 민심에 귀 기울이기 바란다. 낡고 타락한 세계의 조속한 붕괴와 근본적인 쇄신을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