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수수필가
강길수 수필가

오매!*

죄송해요. 오매 하늘나라 가신 지가 올해로 두 번째 강산이 변한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습니다. 어쩌다 오매 생각이 나면 내년이거니 하며 지냈는데, 어떤 일로 조문록을 보다가 올 오월 열 이튿날이 스무 번째 오매 기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얼마나 무심히 살았으면 열 주기는 물론, 스무 주기도 기억하지 못하고 지나쳤을까요. 매년 기제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도리 다했다고 여겼지요. 뒤돌아보니 결혼 후 오매 살아계실 때도, 돌아가신 뒤에도 제 살기에 매몰되어서 ‘오매!’라고 이름 한번 정답게 불러드리지 않은 걸요. 올봄은 유달리 꽃들이 앞 다투어 핍니다. 예전보다 훨씬 많고, 아름다운 봄꽃들입니다. 오월엔 이팝꽃, 아카시아꽃, 장미꽃, 찔레꽃, 딸기꽃, 금계국이 흐드러집니다. 더디어 인동덩굴에도 꽃이 핍니다. 금은화(金銀花) 말입니다. 오매 만난 듯 반갑습니다. 가슴에 스며드는 그 향기가 바로, 오매 내음이기 때문이지요. 동네 어귀 둔덕이나 거랑 가 돌 더미에 산딸기나무, 복분자나무, 찔레나무 같은 벗들과 잘도 어우러져 살면서 봄, 여름 내내 꽃향기 온 세상에 선물했었지요. 오매가 물자배기 이고 오시거나, 저녁 찬거리 다래끼에 메고 들어서실 때 나던 땀내가 곧, 금은화 향기였음을 세월 흐른 후에야 저는 알았습니다.

오매와 인동은 닮았습니다. 아니, 하나입니다. 겨울철 휘몰아치는 높바람에 얼굴 퍼렇게 얼면서, 추위를 이겨내고야 마는 인동의 모습이 바로 오매의 삶이었으니까요. 낳으신 일곱 분신들 중 셋을 어릴 때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사실만으로도, 오매 가슴은 퍼렇게 얼다 못해 검게 굳어버렸을 테지요. 시부모 일찍 여윈 뒤, 큰동서 먼저 떠나보내고 시동생 셋을 건사하여 분가시켰지요. 남편은 동장 등 바깥일 하느라, 집안일에 겉돌다시피 했잖아요. 그런데도 어려움을 내색한다든가, 동서나 시동생들과 말다툼 한 번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매의 한 해가 오롯이 한겨울이었으리라는 걸, 오랜 시간이 제게 가르치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오매는 우리 집 숨은 보호자셨습니다.

오매!….

실로 얼마 만에 불러보는 어머님의 이름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날 우리 동기들은 어머님을 이렇게 불렀었지요. 그땐, 오매가 진짜 이름이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온 동네 아이들이 자기 어머님을 그렇게 불렀으니, 어머님들은 이름이 다 같은 줄만 알았습니다. 지금 불러 봐도, ‘오매!’가 이름보다 더 정겨운 것은 그 때문일까요. ‘그래, 고맙다. 나도 오매가 좋다!’고요. 그러실 줄 알았어요. 역시 오매이십니다. 오매 살아계실 때는, 타향살이 핑계로 한 번도 제대로 챙겨드리지 않았습니다.

사과나무 적과작업 때 떨어지며 생긴 지병악화로, 저희 집에서 삼주 가량 계셨지요. 그때 당신 뒤처리는 끝까지 스스로 하시려 했습니다. 기력이 핍진하여 그 일을 며느리에게 처음 맡길 때에, 변모하시던 오매 얼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절망과 부끄러움, 고마움과 안도감, 회한 등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복합 미묘한 마음이 그려진 초상화였었지요. ‘자괴감’이란 단어가 뼈 속까지 스미는 순간이었습니다. ‘너희들 탈 없이 살면 된다’는 오매 말씀을 도피처로 삼아, 늘 도망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명색이 글을 쓴다며, 오매에 대해 쓴 것은 몇 편이 고작인걸요. 다른 집은 증손까지 본 이들도 많은데, 오매는 두 손주 장가가는 것도 못 보고 떠나셨습니다.

이 불효와 무례를 어찌해야 할까요. 한 가지 위안 삼는 것은, 수녀님을 집에 모셔와 ‘마리아’란 이름으로 비상세례를 받게 해 드린 일입니다. 한 달도 못되어 돌아가실 때, ‘오매! 마리아, 부디 밝은 곳으로 가요. 어쨌든지 밝은 나라로 가세요!…’ 라고 제가 귀에다 속삭여 드렸듯이, 오매는 밝은 빛 가득한 하늘나라에 계신 거지요. 오매 가신 오월의 땅에 봄꽃들이 저리도 아름답고, 금은화 향기 짙으니 말입니다. 앞으론 자주 ‘오매!’ 하고 부를게요. 오매!, 보고 싶어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오매=‘어머니’의 방언(경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