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손, 영화는 훌륭한 오락물이며, 훌륭한 영화는 당대의 삶에 악수를 건네는 법을 잊지 않는다.
상생의 손, 영화는 훌륭한 오락물이며, 훌륭한 영화는 당대의 삶에 악수를 건네는 법을 잊지 않는다.

△1980년대의 알레고리로서의 ‘살인의 추억’

봉준호 감독이 칸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았다. 봉준호는 그 이전부터 주목을 받았는데, 그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살인의 추억’이다.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은 이 소재의 특수성도 있었을 것이나 무엇보다 제목에서 오는 낯섦 혹은 불편함 때문이었다. ‘살인’이라는 말과 ‘추억’이라는 이 어울리지 않는 말의 조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비록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연쇄 살인자가 피해자 발견 장소에 다녀갔음을 암시함으로써 제목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려 한다. 그럼에도 제목에 대한 불편함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가 이 제목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을 때 범인의 악마성이 드러나며 그로 인해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이렇게 “살인의 추억”은 제목과 그 소재의 무게감을 통해 관객에게 스스로를 각인시킨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의도가 범죄자의 악마성과 범행의 잔혹함을 통해 관객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려는데 있는 것은 단연코 아니다. 도리어 이 영화는 80년대 말의 한국사회와 정치에 대한 우회적 말하기를 시도한다.

이 영화의 중심 이야기는 범인을 잡느냐, 잡지 못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범인이며, 어떻게 범인을 범인으로 입증하느냐 하는가에 있다. 사건은 분명 실체로 나타났으며 심증이 가는 용의자 또한 있다. 그러나 이 용의자에 대한 물증은 없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관념은 명확하나 그 존재를 증명할 현상을 찾을 수 없는 즉 ‘실재’와 ‘실제’의 문제로 치환된다.

이 실제를 확인하기 위해 박두만과 서태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수사를 벌인다. 이를테면 박두만은 직관과 통찰이라는 선험적 방법으로, 서태윤은 자료의 분석이라는 경험적 방법으로 그 본질(범인)에 다가서려 한다. 이 방법의 변증을 통해 그들은 본질에 대해 다가가고, 하마터면 그들은 ‘존재의 본질’을 확인할 뻔 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해 온 ‘존재’는 존재가 아닌 ‘존재자’였을 뿐이다. 존재와 존재자를 확인시킬 수 있는 물리적 증거라 여겨지는 정액검사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존재와 존재자는 ‘차이’를 가지게 되고, 존재는 더 이상 ‘드러냄’을 꺼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이러한 철학적 문제만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를 테면 범인을 체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경찰 동원이 이뤄지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인근 지역의 경찰 대부분이 데모 진압을 위해 동원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정, 조용구 형사의 군화가 갖는 상징성과 폭력성, 이런 것들은 그 시대에 대한 우회적이고도 간접적인 말하기 장치라 할 수 있다.

1970년을 거쳐 80년으로 들어오면서 한국의 사회는 한층 더 산업화와 도시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독재는 새로운 이름으로 나타났고 민중은 여전히 그들의 군화발을 감내해야 했다.

인간 존재에 대한 믿음과 이상, 이런 것들은 관념적인 어떤 것으로 분류되었다. 현실은 이런 이상사회 건설보다는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성과에 더 많은 기대를 걸었다. 즉 민중의 요구는 관념적 ‘실재’로 치부되었고, 정치가와 기득권은 ‘실제’적 성과를 얻기 위해 민중을 수탈하였다. 민중은 분노하였고 스스로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실력 행사를 하였다. 80년대 말 이 노동자 대투쟁은 대통령 직선제 선출이라는 결과물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4·19혁명이 그랬듯이 정권의 이양 방법만 달라졌을 뿐 그 구조적 질서는 변화하지 않은 실패한 혁명이었다. 그 모순의 질서를 극복하기 위해 민중은 또 다시 싸워야만 했고, 그 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즉 80년대는 민주 사회 건설이라는 ‘실재’를 실체화하기 위한 도정의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실재적 범인을 실체화하려는 이 영화는 스릴러가 아닌 80년 말 한국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올드 미스 다이어리’와 2000년대식 사랑

염상섭은 ‘삼대’라는 소설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중재할 대안적 세대로 덕기를 내세웠다. 민족문학파였던 염상섭은 KAFF의 유물론적 사관에 영향을 받기라도 한 듯 세대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진보한다. 이후 이 소설의 개작에서 그는 더욱 덕기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새 세대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정말 염상섭의 생각이었다면 그는 중요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조의관과 수원댁 사이에서 난 딸아이의 삶의 문제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를 잃고 아버지 같은 조카(덕기)의 집에서 살아야 하는 이 딸아이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비극이다.

그럼에도 1930년대 이러한 세대 모티프는 이광수, 채만식, 이태준 등의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트렌드였으며, 다른 세대에 대한 희망, 그것이 그 시대를 헤쳐갈 수 있는 하나의 탈출구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IMF와 FTA라는 급격한 국제정세에 휘말려 있는 2000년대 세대 모티프는 어떠할까? 이러한 질문이 “올드 미스 다이어리”라는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영화는 민족도 국가도 민족의 미래에 대한 영화가 아닌 한 노처녀의 사랑 성공담이니까…. 굳이 소설 “삼대”와 이 영화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그것은 삼대(三代)를 다루고 있다는 것 하나뿐이다.

염상섭의 소설과 70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조의관은 죽은 후 제삿밥을 걱정하는 구닥다리 할아버지이다. 반면 이 영화 속 세 할머니는 살아있는 지금을 후회 없이 살려고 노력한다. 꽃무늬 속옷과 연애, 조의관이 가진 관념적 사고에 비해 그 얼마나 생동감 있는가. 조의관이 현세와 내세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진 존재라면 이 영화 속 할머니들은 그것을 거부한다. 그들이 현실 속에 당당히 발을 내딛고 그 삶에 집중할 때, 그들은 더 이상 고리타분한 구세대가 아니다. 젊은 세대와 나란히 호흡할 수 있는 세대, 아니 세대적 경계나 구분 그 자체를 허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세대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옥과 혜옥이 승현의 사랑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지켜 볼 때 윤아와 지영(미자의 친구들)의 목소리로 더빙되어 나오는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장면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1930년대가 새 세대를 기다렸다면, 2000년대는 우리에게 한 세대에 대한 고정관념에 대한 탈피를 원하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이 질곡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세대가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이며, 그 시작은 헐리우드의 영웅들이 밥 먹듯 떠드는 국가와 민족과 인류가 아니라 바로 우리 소시민의 사소하고도 사소한 생활의 변화임을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할 또 다른 하나는 ‘사랑=결혼’라는 공식을 거부한다는데 있다. 할머니 승현이 원하는 것은 결혼이 아니다. 서른두 살 최미자가 원하는 것은 결혼이 아니라 연애 곧 사랑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사랑담은 재기발랄하다.

물론 사랑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주제였다. 그러나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 사랑의 주인공은 공주나 왕자 아니면, 권력과 부를 가진 평범하지 않은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지고지순하며, 또 운명과도 같고,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는 낭만적 사랑이었다.

이제 사랑은 바로 우리 주변에 있으며, 사랑은 어떤 식으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존재로 변모하고 있다. 어쩌면 사랑이 그 가치를 잃어가고 있으며, 우리의 삶이 이전 보다 훨씬 타락해간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사랑은 그저 다이어트를 했을 뿐이다. 사랑 옆에 의무처럼 따라오는 결혼과 결별했을 뿐이다. 결혼과 하나인 줄 안 사랑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을 뿐이다. 이제 자유를 찾은 사랑이 우리를 찾아오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랑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바로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