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류굴 제8광장서
560년 행차 명문 발견
선박 이용하고 50명 보좌
생전 이름 ‘진흥’ 명확해져

신라시대 금석문이 대거 발견된 울진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에서 신라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이 560년에 다녀갔다는 명문이 나와 학계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울진군은 심현용 울진군 학예연구사와 신라사 전공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가 함께 판독한 성류굴 명문을 23일 공개했다.

판독한 명문의 내용은 ‘庚辰六月日(경진육월일)/ 柵作익<木+益>父飽(책작익부포)/ 女二交右伸(여이교우신)/ 眞興(진흥)/ 王擧(왕거)/ 世益者五十人(세익자오십인)’이다.

이번에 확인된 명문은 삼국사기 등 문헌에 나오지 않는 자료로, 울진 성류군에 신라 화랑뿐만 아니라 임금이 다녀갔으며 당대 정치·사회 변화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역사 기록으로 평가된다.

명문이 있는 장소는 지난 3월 신라시대 문자자료가 무더기로 확인된 성류굴 제8광장이다. 명문은 지표 기준으로 약 2.3m 높이에 가로 35㎝, 세로 40㎝인 굴곡진 면에 음각됐다. 글씨는 예서(고대 서체인 전세를 간략하게 만든 서체) 분위기가 있는 해서(정자체)이다.

명문은 세로 6행으로 1행에 5자, 2행 5자, 3행 5자, 4행 2자, 5행 2자, 6행 6자로 모두 25자를 새겼다. 글자 크기는 가로 7∼8㎝, 세로 7∼12㎝ 정도이다. 반면, ‘眞興王擧’(진흥왕거)라는 네 글자는 다른 글씨보다 유독 크게 써서 강조했다.

내용은 “경진년(560, 진흥왕 21년) 6월 ○일, 잔교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러 먹였다. 여자 둘이 교대로 보좌하며 펼쳤다. 진흥왕이 다녀가셨다(행차하셨다). 세상에 도움이 된 이(보좌한 이)가 50인이었다”로 해석된다고 울진군은 설명했다.

조사단은 “경진년(560년, 신라 진흥왕 21년) 6월에 진흥왕이 울진 성류굴에 행차하여 다녀간 사실을 확인했다”며 “진흥왕의 이동에는 선박이 활용됐고, 행차에는 50인이 보좌했으며, 행차와 관련해 동굴 내부를 잇는 잔교가 설치됐음을 알 수있다”고 설명했다.

조사단은 특히 ‘진흥’(眞興)이라는 글자를 통해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드러났다고 강조했다. 568년 북한산·황초령·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에는 ‘진흥태왕’(眞興太王)으로 기록된 왕명이 560년에는 ‘진흥왕’이어서 왕명 변화 과정을 보여준다. 아울러 중국 역사서인 ‘북제서’에는 “신라국왕 김진흥(金眞興)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는 문구가 있는데, 성류굴에서도 ‘진흥’이라는 이름이 확인됐다.

무성제 하청 4년은 진흥왕 26년(565)으로, 성류굴 명문 작성 시점이 5년 빠르다. 이를 통해 진흥왕이 생전에도 이름이 ‘진흥’이었음이 더욱 확실해졌다.

심현용 연구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에는 진흥왕 20년(559)부터 22년(561)까지 기록이 비어 있다”며 “성류굴 명문은 공백기로 남은 진흥왕 대 역사상을 알려주는 엄청난 자료”라고 밝혔다.

심 연구사는 이어 “성류굴 신라 명문들은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에 버금가는 신라 금석문의 보고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울진/주헌석기자 hsjoo@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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