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부여 유스호스텔’이라는 곳은 부여에서 대천 쪽으로 가는 반교리에 있었다. 일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쬐끔만 더 가면 바로 대천이라고 했다. 유스호스텔은 1999년에 폐교된 반교 초등학교 자리에 세운 것이었다. 우리 3조는 한밤에 건물을 빠져나와 축구장에서 서로 공을 차넘기는 놀이를 했다. 잔디가 두텁게 깔린 축구장은 아침에 조기축구 시합이라고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 우리는 모두 늦게 일어났고, 아름답게 단장한 유스호스텔을 아쉽게 떠났다. 다음 행선지는 공주, 우리는 우금치로 갔다 공산성을 보고 풀꽃문학관에 들렀다 마곡사까지 가도록 되어 있었다. 전날 우리는 부여에서 신동엽 문학관에 갔다 걸어서 구드레 조각공원에 가 정한모 선생의 시비를 찾았고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고란사 아래까지 갔다. 여기서 고란사로 해서 낙화암으로 가면 잃어버린 나라 백제의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반교리를 떠난 버스는 한 시간 남짓해서 우금치 고개에 우리를 세워 주었다. 조교가 오늘이 마침 동학혁명기념일이라 했다. 올해 들어 처음 기념일로 지정했다고, 황토현 싸움에서 승리한 날을 기념일로 삼았다더라고 했다. 옆에서 지금까지 기념일이 없었냐고, 놀랍다는 탄성을 발했다. 부패 정치와 외세에 대항하여 일어난 민중혁명을, 그것도 실패한, 좌절된 혁명을 국가가 선뜻 기념하려 했을 리 없다.

이제 우리는 우금치 동학혁명군 위령탑 아래 섰다. 1973년 11월 11일에 건립되었다는 이 탑은 아직도 어디 하나 금간 곳 없이 깨끗해 보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동학의 이상과 구한말의 시대상황에 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신동엽 시인의 서사시 ‘금강’에 나오는 해월 선생의 일화를 들어 동학의 만민 평등사상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철저하다고 했다.

손상된 곳 없는 위령탑이지만 비문에는 누군가 훼손한 흔적이 남아 있었고 이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1985년에는 한 사회단체에 의해 동학혁명과의 계승관계 등 이념 갈등 소지가 있는 비문의 일부 문구(5·16 혁명, 10월 유신, 박정희 대통령 등)가 훼손되는 사건이 있었음.” ‘포덕’ 114년 11월 11일에 당시 천도교 대령이던 최덕신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위령탑건립위원회의 명예회장을 맡아줄 것을, 제자의 휘호를 내려줄 것을 “앙청”하였던 사실이 위령탑 뒤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최덕신은 1986년 4월에 북한으로 가 천도교 청우당의 중앙위원장이 되고 다른 요직들을 거치다 세상을 떠났다.

1970년대에 동학혁명을 10월 유신에 연결 지으려는 시도들이 있었음을 이 위령탑은 보여준다. 그러나 기념일은 이제야 마련된 모양이다. 나는 역사의 씁쓸함을 곱씹으며 그날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학살’당한 일만 명 동학군 영령들을 위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우금치는 나 살던 공주 봉황동에서 지척거리다. 일곱 살 때 봉황동 산동네 샘골에 살 때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때 공주고등학교에 김종필 씨가 헬리콥터를 타고 와서 두 살 아래 동생과 함께 구경을 나갔다. 공주고등학교 체육 선생이시던 아버지는 출근하실 때마다 코끼리 저금통에 십원짜리 하나씩을 넣어주셨는데, 동생이 이걸 들고 나갔다 헬리콥터에 넋이 나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서는 1970년대와 함께 나는 아버지를 따라 대전으로 나가 초중고를 나왔다. 의식이 생기자 역사가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서울로 대학을 가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나의 1980년대였다. 우리는 동학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망각하면 똑같은 시련이 다시 닥치는 법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