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김석모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미국 뉴욕의 중심에는 100만평이 넘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857년 만들어진 센트럴 파크이다. 세계 경제수도의 한 가운데 거대한 면적의 부지에 고층 빌딩들을 지었다면 경제적으로 훨씬 효용성이 높았을 텐데 휴식의 녹색공간을 마련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도시, 사람 그리고 자연의 관계를 단순한 경제논리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토록 많은 차들이 거리를 가득 메움에도 불구하고 매연이 코끝을 크게 괴롭히지는 않는다.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밀집해 살아가는 도시는 파괴적 본능을 가질 수밖에 없다.
 

도시의 몸집이 크면 클수록 파괴의 정도와 범위가 그에 비례해 증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뉴욕은 도심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공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시의 폭력성이 어느 정도 잘 다스려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는 도시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세계에서 가장 바쁘기로 소문난 뉴요커들은 아침저녁으로 넥타이와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센트럴 파크를 걷고 달린다. 볕 좋은 주말을 즐기기에 센트럴 파크보다 좋은 곳은 없다. 그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담아내고서도 누구나 각자의 여유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은 100만평이라는 상상을 넘어선 규모 덕분이다.

선진국들을 방문해 보면 자연이 있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미술관이 있다.센트럴 파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공원을 동쪽으로 접하며 뻗어 있는 그 유명한 5번가(5th Avenue)에는 ‘뮤지엄 마일’(Museum Mile)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구태여 번역하자면 ‘미술관지구’ 정도가 된다. 이곳에는 아홉 개의 미술관들이 가까운 거리에 모여 있습니다.
 

그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메트로폴리탄미술관(1870년)과 구겐하임 미술관(1937년)도 있고 아담한 규모에 탁월한 소장품을 자랑하는 ‘프릭 컬렉션’(1935년)과 클림트의 걸작 ‘우먼 인 골드’ 등 오스트리아 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노이에 갈러리’(2001년)도 빠뜨릴 수 없다.

파리에는 루브르가, 런던에는 내셔널갤러리가, 마드리드에는 프라도 미술관이 있다면 뉴욕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설립된 것은 1870년인데, 믿기 어렵겠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 단 한 점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미술관이 문을 연지 149년이 지난 지금 300만 점 넘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루브르가 공식적으로 밝히는 소장품의 수가 약 38만 여점이니 그 보다 10배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두 개의 분관까지 함께 운영하며 로마의 바티칸 미술관을 제치고 루브르에 이어 세계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이 찾는 두 번째 미술관으로 이름을 올렸다. 루브르가 프랑스 왕실의 소장품에서 출발하여 시대의 요청에 따라 공공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면, 바티칸 미술관 뒤에는 교황이라는 절대 권력의 엄청난 수집품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그 시작부터 달랐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역사는 1866년 7월 4일 파리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시작되었다. 그날은 미국의 독립 기념일이었는데 프랑스에 거주하던 미국인 기업가들이 조국의 독립을 기억하고 축하하기 위해 회합을 가졌다.

그 자리에 존 제이(John Jay)라는 인물이 외교관 자격으로 참석해 청중들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된다. 그는 미합중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지 백 년이 다 되어가지만 제대로 된 미술관하나 가지지 못한 자신들의 현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미국인들이 미술을 향유하고 수준 높은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공미술관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다수의 위대한 역사가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에서 시작된 것처럼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역사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수 년 간의 설득 끝에 1870년 4월 13일 뉴욕 주(州)의회는 미술관 설립을 승인했고 2년 뒤인 1872년 뉴욕 맨하튼 5번가 681번지에 문을 열었다. 임대건물에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그나마 미술관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철도회사를 운영하던 존 테일러(John Taylor)의 기증 덕분이었다. 테일러가 기증한 개인 소장품에서 시작된 미술관이 오늘날 세계가 인정하는 인류문명의 보고(寶庫)로 자라난 것은 기업인들의 헌신적인 나눔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동편 건물에는 ‘록펠러 윙’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곳에는 아프리카나 태평양 섬 원주민들의 전통미술이 소개되고 있는데, 1969년 넬슨 A. 록펠러가 기증한 3천여 점의 작품이 토대가 되어 지금은 그 규모가 1만1천점 이상으로 늘어났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금융회사리먼 브라더스의 최고경영자였던 로버트 리만이다. 1969년 로버트 리만은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이 평생토록 수집한 2천600여점의 걸작들을 모두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리고 미술관은 리만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에서 딴 전시관 마련하여 기증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리만 컬렉션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자랑하는 최고의 하이라이트이다.

리만이 남겨준 유산들은 이탈리아 거장들의 대표작에서부터 바로크 그리고 모던 클래식으로 이어지는 서양미술사 전체의 흐름을 총망라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리만의 특별한 컬렉션을 관람객들에게 가장 현장감 있게 소개하기 위해서 실제 그의 저택과 꼭 닮은 전시실을 조성하여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은은한 자색의 비단으로 꾸며진 따듯한 분위기의 전시실.

그 한 가운데는 보기에도 안락한 소파가 놓여 있어 방문객들에게 쉼터를 마련해 준다. 여기 앉는 누구라도 마치 리만에게 초대받아 그의 아주 사적인 공간에 머물며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들이 정해놓은 입장료 정책이다. 이른바 ‘pay-as-you-wish’(원하는 만큼 지불하시오)라는 정책인데 공식적인 입장료를 부과하는 대신 미술관 운영을 위해 모든 방문객들의 자발적인 기부를 끌어내겠다는 획기적인 발상이다.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부담없이 형편에 따라 미술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입장료 정책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숭고한 설립정신을 고이 이어가겠다는 고집이자 미술의 공적 가치를 자본의 논리로부터 지켜가겠다는 확고한 의지처럼 보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반백년이나 이어온 이러한 전통이 재정 압박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2018년 3월 1일 미술관은 입장료를 징수하겠다는 공식발표를 했다. 다만 공공기관으로서의 성격 때문에 뉴욕에 거주하는 시민들에게는 원래의 혜택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단서 조항이 붙기는 했다. 책정된 입장료가 성인이 제값을 모두 주었을 때 25달러이니 적지 않은 금액이다.

발 디딜 틈 없이 세계 곳곳에서 밀려드는 관람객에도 불구하고 이익은 고사하고 적자를 면치 못했다니 미술관 운영을 위해 입장료 징수를 결정한 사정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50년 동안이나 방문객들의 자발적 참여를 고집해 온 것을 고려해 보면, 유료로 전환되었다고 해서 지난 정책이 반드시 실패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개장 시간은 오전 10시이지만 이른 아침부터 신전처럼 생긴 미술관의 높은 계단을 따라 입장을 기다리는 방문객들의 길고 긴 줄이 이어져 있다.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참 부러운 풍경이다. 훌륭한 소장품으로 가득 찬 보물창고 같은 미술관이 부럽고, 그런 미술관이 가능하도록 동참한 사람들의 고귀한 정신이 부럽고,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러울 따름이다.

/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