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욱시인
김현욱 시인

직장 선배가 한숨을 쉰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딸이 연기를 하겠다고 결심했단다. 대도시에 있는 연기학원에 딸을 데려갔다 데려와야 한단다. 듣고 보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중학교 때 연극을 시작했는데 몇 번 무대에 서고, 크고 작은 상을 받더니, 결국 이렇게 됐다.”

선배는 고생도 고생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이 험한 가시밭길을 가려고 하는 게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나는 언젠가 읽은 매슬로우의 ‘절정경험’이 떠올랐다.

“무대에서 절정경험을 했기 때문에 쉽게 포기안 할 겁니다. 원하는 대로 밀어주세요.”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는 절정경험을 “인간의 최상의 순간들,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 황홀, 환희, 행복, 큰 기쁨 등의 경험들”이라고 말했다. 매슬로우는 이 짤막한 신비의 순간들을 자아실현의 경험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들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들고 사람들의 내적 분열, 사람 사이의 분열, 사람과 세계 간의 분열 등을 치유함으로써 삶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는 하느님을 엄격한 존재로만 알았다. 성서를 다시 읽으면서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자기도 모르게 “아!”하는 탄식을 질렀다고 한다. 이것을 ‘아! 경험(aha experience)’이라고 하는데, 루터의 ‘아! 경험’은 매슬로우의 ‘절정경험’처럼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을 경험하는 일이다.

필자는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골방에 앉아서 첫 소설을 썼다. 200자 원고지 70매쯤 되는 엉성한 단편소설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써 본 소설이었고, 끝까지 써 본 소설이었다. 한 달 동안 원고지 앞에 앉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며 알 수 없는 희열과 시간이 왜곡되는 경험을 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마지막 문장을 쓰고 소설에 마침표를 찍었을 때 느낀 기쁨과 성취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고등학교 때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같은 책을 밤새워 읽다가 창으로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바라보며, 커다란 행복과 환희를 느끼곤 했다.

유시민의 ‘공감필법’이란 책에도 루터의 ‘아! 경험’, 매슬로우의 ‘절정경험’과 상통하는 ‘결정적 순간!’이 나온다.

“여러분은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책 읽다 말고, 도저히 계속 읽을 수가 없어서, 읽던 책을 가슴에 댄 채 ‘아’ 하고 한숨을 내쉬는 경험 말입니다. 여자분들이 보통 그렇게 하지요. 이런 순간을 자주 경험하셔야 합니다. 감정이 너무 강하게 일어나서, 그걸 가라앉히기 전까지는 텍스트를 더 읽어갈 수 없는 그런 순간을 누리자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공부와 독서의 ‘결정적 순간’이라 믿습니다. 남자들은 조금 다르게 행동하더군요. 책을 가슴에 붙이는 게 아니라 읽던 페이지가 아래로 향하게 엎어둡니다. 위를 보면서 ‘후’ 내쉰 다음, 창문을 열거나 마당엔 나가서 담배를 물어요. ‘끊어야 할 텐데…….’ 이러면서요. 그렇게 감정을 추스르고서는, ‘대박이야’ 이러면서 또 책을 봅니다. 바로 이거예요. ‘결정적 순간!’ 이런 순간을 체험하지 못하는 인생은 불행한 겁니다.”

긍정심리학의 대표적인 연구자인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우리의 행동과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이 된 듯한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그것을 ‘최적 경험’이라고 했는데 ‘아! 경험’, ‘절정경험’, ‘결정적 순간’과 같은 맥락이다.

‘아!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 학교와 학원을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우리 아이들은 언제 ‘아! 경험’을 해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