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별아의 신라정신의 원류와 본질을 찾아서

진평왕릉에서 명활산성으로 이어지는 숲 머리 뚝방길. 수로를 흐르는 물소리를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숲길이 2km 정도 이어져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진평왕릉에서 명활산성으로 이어지는 숲 머리 뚝방길. 수로를 흐르는 물소리를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숲길이 2km 정도 이어져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경주에서 십여 년 동안 택시를 운전했다는 기사님도 처음 가보는 곳이라 했다.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찍고 지칫지칫 좁은 길을 달려갔다. 로드뷰에도 나오지 않는 진평왕릉은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마을의 허허벌판에 있다. 겨울이라 더욱 그렇겠지만, 인터넷에 멋들어진 사진과 함께 소개된 산책지로 좋다는 말만 믿고 왔다가는 ‘뭥미?’ 할 것 같다.

진기하고 보배로운 것도 너무 많으면 평범하고 대수로울 수 있다는 것을 경주 여행을 통해 새삼 깨닫는다. 그렇다고 진기함과 보배로움이 사라질 것은 아니지만, 귀히 여기며 간직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진흥왕릉과 진지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을 보고도 그랬지만, 진평왕릉도 기대보다 작고 초라해서 실망이라기보다 안타깝다.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무덤의 주인 3명이 ‘미실’이 색공을 바친 ‘황제’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복군주인 24대 진흥왕, 황음하여 왕좌에서 쫓겨난 25대 진지왕, 그리고 신라의 국운을 펼친 것으로 평가받는 26대 진평왕은 각각이 특별한 이야기를 지닌 왕이다. 진평왕은 무엇보다 13세에 왕위에 올라 69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54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월성의 주인이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98세까지 살아서 79년을 재위한 고구려의 장수왕에는 비할 수 없으나, 53년을 재위한 백제의 고이왕과 조선의 영조에 비견할 만하다. 무엇보다 신라 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왕이었고, 그 시간만큼 업적도 많다.

“내제석궁(천주사)에 행차하였는데, 돌계단을 밟으니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의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돌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어, 후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도록 하라”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평왕의 일화는 키가 11척(약 3.5미터)이나 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과 더불어 권력과 지배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의미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진평왕은 진흥왕의 손자지만 그의 아비는 임금이 되지 못하고 죽은 동륜태자다. ‘삼국사기’에 나와 있지 않은 동륜태자의 사인이 ‘화랑세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아버지 진흥왕의 후궁인 보명궁주와 몰래 정을 통하다가 보명궁에서 기르는 개에게 물려죽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개죽음이다. 이 대목에서 영조와 사도세자와 정조의 트라이앵글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거의 강박적으로 노력했던 것처럼, 진평왕은 삼촌인 진지왕이 폐위하며 행운으로 오른 왕위를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콤플렉스를 품은 이들은 소리 없이 맹렬하다. 진평왕은 26세가 되던 해에 남산성을 쌓고 이어서 명활산성을 고쳐 쌓았다. 서라벌에 대한 경계를 확실히 하는 한편 백제와 고구려에 대항해 한판 벌릴 준비를 한 것이다.

진평왕의 시절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칠숙과 석품의 반란을 비롯한 내부의 반란들 또한 그를 위협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기어이 버텨서 마침내 이긴 진평왕은 지혜로운 딸 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 무덤 속에 누웠다. 여기서 멀지 않은 낭산 기슭에 선덕여왕릉이 있으니, 바람결에라도 부녀의 정담을 흔연히 나눌 수 있을 테다. 부디 고단했던 삶을 모두 잊을 만큼, 평안하시기를.

‘월성 뚝방길’이라는, 이름 하나에 홀렸다. ‘비담과 김유신의 일화로 유명한 명활산성에서 보문들판 속 고즈넉한 진평왕릉으로 이어지는 뚝방길’이라는 설명도 그럴 듯했다. 물론 ‘월성 뚝방길’이 경주시 월성동에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우리의 월성과 너무 멀어서 의아했다. 확인해 보니 ‘월성 뚝방길’이라는 이름이 무리했는지 명칭을 ‘숲머리 뚝방길’로 바꾼 것 같다. 명활산성에서 숲머리 남촌마을 신라 제26대 진평왕릉까지 약 2km 구간의 둘레길이다.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나선 김에 걷기로 했다. 전국 어디를 가도 일종의 트레킹 코스인 ‘둘레길’을 만날 수 있다. 제주 올레길이 여행자들을 불러 모으고 북한산 둘레길이 화제가 되면서 각 지자체에서 경쟁적으로 둘레길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지리산 둘레길, 서울 두드림길, 충남 아라메길, 전북 구불길 등이 등장했고, 제주 올레길의 성공에 영감을 얻은 일본에서 로열티를 주고 수입해 가져가 큐슈 올레길을 만들었다.

근래에 들어서는 둘레길이 남발되면서 지역의 관광자원을 개발한다는 명분으로 토목공사를 벌인다는 비판도 받지만, 자동차로 휙 돌아보는 관광이 아닌 도보여행 코스가 생긴다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루통은 ‘걷기 예찬’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걷기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털어낸다.”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모든 것과 다 손잡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불구불한 길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길을 더듬어 간다.”

이렇게 좋은 일을, 어찌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월성 뚝방길’, 혹은 ‘숲머리 뚝방길’은 지자체의 사업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정비했다고 한다. 그 사실이 나름의 의미를 갖긴 하지만 자원봉사자들의 청소와 전정 작업으로는 산책로 정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진평왕릉에서 명활산성까지 약 1킬로미터 정도까지는 그럭저럭 산책할 만한 길의 꼴을 갖추고 있지만, 나머지 1킬로미터는 생활쓰레기와 마구 자란 나뭇가지들을 헤쳐가야 한다. 아무리 길은 걸어가면서 만들어진다지만 앞선 사람도 뒤따를 사람도 보이지 않으니 이게 과연 길인가 싶다.

어쨌거나 길 끝에는 명활산성이 있을 것이다. 자비마립간 18년(475)에 월성에서 옮겨와 소지마립간 10년(488)에 다시 월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약 13년 동안 왕이 거주했던 성이다. 월성의 다른 이름을 재성(在城)이라 하는 것은 왕이 머무르며 거주했다는 뜻이니, 명활산성도 잠시나마 재성으로서 왕성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명활산성을 언제 지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삼국사기’에 첫 등장이 실성이사금 4년(405)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인 것으로 미루어 그 이전에 축성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명활성이 월성의 동쪽에 있으며, 돌로 쌓았고 둘레가 7,818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이 다급히 옮겨가야 했던 성, 머무르며 지켜야만 했던 성, 명활산성은 여전히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뚝방길’이 끝나고 보문단지로 건너가기 전에 오른편에 흰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동절기 작업 중지 기간이라 빈 성에 운 좋게 들어가 보았다.

입구 쪽 성벽을 작업하는 중이라 안쪽에 동네 주민들이 텃밭을 일군 흔적까지 고스란하다. 원래 명활산성의 축성 방식이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는 신라 초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더니, 과연 성벽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돌들이 서로 맞물려 쌓여있다.

아래서는 정확한 성의 모양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산을 타고 올라가 임시로 터놓은 산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명활산성의 쓰임새가 무엇인지 확연해진다. 산 아래 성 바깥에서 보는 모습과 산 위 성안에서 보는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누군가의 공격에 방어하고, 또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지어진 성이 분명하다.

경주시 보문동과 천군동에 걸쳐 자리한 명활산의 입구에서 명활산성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현재 복원 중인 산성의 끝자락을 따라 이어진 숲길로 산을 오르다 보면, 곳곳에 신라시대 당시 산성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돌무더기를 발견할 수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경주시 보문동과 천군동에 걸쳐 자리한 명활산의 입구에서 명활산성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현재 복원 중인 산성의 끝자락을 따라 이어진 숲길로 산을 오르다 보면, 곳곳에 신라시대 당시 산성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돌무더기를 발견할 수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자비마립간이 월성을 비우면서까지 명활산성으로 몸을 옮긴 것은 백제 개로왕이 아차성에서 고구려 장수왕에게 살해된 사건과 관련된다. 이후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고, 고구려는 죽령과 동해안으로 더욱 바싹 위협해온다.

명활산성은 신문왕의 ‘호국행차길’과 이어지고, 호국행차길은 다시 동해로 이어진다. 문무대왕이 죽어 용이 되어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길, 그곳은 왜구의 침범 루트이기도 했다. 땅을 지키고, 왕국을 지키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령을 지키기 위해 이 가파른 성이 지어진 게다. 치열한 전투 속에 수성의 깃발을 놓치지 않고 천년을 견딘 게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마음이 아릿하다. 살아가는 것이 살아있는 것들의 본능일지니!

명활산성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비담과 김유신이다. 선덕여왕 14년(645) 상대등으로 승진한 비담은 2년 후(647) 정월에 염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반란의 명분도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그런 여자 임금한테 벼슬을 받을 때는 언제고!).

선덕여왕은 월성을 지키며 방어하고, 비담의 반란군은 명활성에 주둔해 대치한다. 밀고 밀리는 공격과 방어가 10일 동안 이어지다가,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비담이 반란군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다고 하니, 이는 여자 임금이 패할 징조로다!”

비담의 선동에 반란군은 사기가 충천해 환호를 지르니 그 소리가 천지에 진동했다. 선덕여왕이 공포를 느끼며 괴로워할 때 김유신이 상황을 역전시킬 묘안을 냈다.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여 연에 실어 날려 보내니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사람들이 길가에 서서 이상한 이야기를 수군거린다. 어젯밤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김유신이 여론 조작을 위해 풀어놓은 사람들이었다. 김유신은 흰 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신에게 제사를 바치며 빈다.

“…하늘의 위엄으로 사람이 하려는 것에 따라 선한 이를 옳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神)으로서 잘못을 하지 마시옵소서!”

충격과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었던지, 선덕여왕은 반란이 진압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로부터 아흐레가 채 지나지 않아 반란 괴수 비담이 잡혀 목이 잘린다.

비담의 난에 대해서는 상대등의 왕위추대운동이라는 설, 화백회의가 국왕에게 퇴위 요구를 하자 김유신을 위시한 선덕여왕측이 일으켰다는 설, 동륜태자 계열이 진지왕계에 대한 반대운동이라는 설 등등 숱한 추측이 있다.

그 후로 세월이 흘러 월성은 사라지고 명활산성은 돌무더기로 남았다. 선덕여왕의 고통과 비담의 역심, 그리고 김유신의 충심이 어떤 빛깔이었는지도 시간 속에 흩어진 비밀이 되었다. 다만 힘껏 싸우고 힘껏 살았으니, 오로지 차곡차곡 쌓인 돌들만이 진실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이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애당초 그리 많지 않은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