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이라면 서울에서는 한 시간 거리다. 두어 주 전에 수원 화성 근처에 갔을 때다. 문학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좋은 봄날에 화성 성곽 둘레길을 걸어 보자 한 것이다. 과연 아름다운 화성이었다. 정조가 임금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거처하려 했다는데, 그럴 만큼 웅장하고도 수려한 성이라 할 수 있었다.

봄날도 화창하고 인연 있는 사람들끼리 모처럼 만나 산책을 즐기는 것도 좋았다. 나중에는 시낭송도 했는데, 그 전에 우리 몇 사람은 먼저 자리 잡고 앉아 막걸리라도 두어 대접 마시자 했다.

막걸리 사러 슈퍼에는 누가 가나? 하면 응당 나이 어린 내가 가야 하는데, 내가 먼저 커피를 샀다고 막걸리는 당신이 산다고 따라 나선 분이 계셨다.

올해 초던가 작년 말이던가 건강이 안 좋아져 학교를 그만두고 양평 쪽으로 낙향해 가신 선배 시인이셨다. 이명이 심한 데다 또 어딘가 안 좋은 곳이 생겨 급기야는 몇 년 먼저 퇴직을 하신 것이다. 요즘은 향리에서 땅을 파다 보니 건강도 회복되시는 것 같다 해서 다행이라 여겨졌다.

나는 막걸리라면 온 동네 막걸리를 다 먹어 본 솜씨라, 수원에도 수원 막걸리가 있는 것을 아는데, 정작 그 집에는 장수 막걸리만 있었다. 이제 돈을 내야 할 차례인데, 요즘 물건 값은 어디서도 전부 카드로 결제하기 마련이다.

그분이 카드를 빼들고 얼마냐고 묻는데, 아마도 몇 천원 인가 했다. 서너 병 샀으니, 한 병에 천삼백원 정도 한다고 보면 아마도 삼천구백 원이나 사천이백 원 정도 아녔을까? 가게 주인이 막걸리 값을 말하자 그분은,

어! 그러면 그건 현금으로 내야겠군요.

하고 주머니를 뒤져 천 원짜리 지폐들을 꺼내 세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작은 돈이라 카드로 내기 미안하다고 하셨다.

돈은 그분이 내서 좋았고 막걸리 든 ‘봉다리’는 내가 들고 낭송회장으로 쓰는 카페 자리로 돌아오는데 문득 생각되는 게 있다. 나도 그래야겠다는 것이었다.

요즘 경기들이 좋지 않으니, 슈퍼나 편의점도 썩 잘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슈퍼니 편의점에 들러 사는 것은 막걸리 등속이 고작인데, 나 편하자고 늘 ‘알바’생이나 점주에게 카드를 내밀곤 했다.

현금이 돌지 않아 작은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더 힘들다고 들었건만 그건 그냥 남의 소식으로나 치부했었다. 사람이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또 어려우면서도 작은 것부터 쉽게 해낼 수도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퇴직 선배는 향리로 돌아가시지 전에도 다른 사람들 대하기를 사뭇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우셨고, 남의 험담 하기를 극력 꺼려하는 면모를 지니고 계셨다. 고향으로 돌아가 봄맞이로 땅을 갈아엎고 있다 하시니, 더욱 흙의 덕성을 태생적으로 가진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아니 들 수 없다.

세상이 정의로워져야 한다고, 원칙도, 상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높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하기에는 그런 큰 생각만으로 세상은 충분히 살만하게 되는 것 같지만은 않다. 그 빈틈들은 흙이, 흙의 부드럽고 따사로운 알갱이들이 메워 주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현금을 자주 내는 사람이, 나도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먼저 우리 집 앞 편의점에서부터 말이다. 봄빛 좋은 수원 화성 나들이 날이었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