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별아의 신라정신의 원류와 본질을 찾아서

명리학에서 말하는 무토(戊土) 일간이라 그런지 땅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낯선 동네를 지날 때면 주거지와 상가의 앉음새를 유심히 보고 인터넷 부동산사이트에서 시세도 살펴본다.

애석하게도,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것과 투자 능력이 있는 건 다르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그래서 집값이 높은 ‘좋은 동네’의 특징 정도는 찾아낼 수 있다.
 

울주에서 발원해 영일만으로 흘러나가는 형산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
우리나라의 강이 대부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데 비해 특이한지라, 풍수지리의 신봉자들은 후발주자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까닭이 북으로 흐르는 형산강의 기운 덕택이라고 주장하기도….

근대 이후, 특히 근래에 들어서는 학군이나 인프라(이를테면 지하철역과 가까운 ‘역세권’이라든가, 공원과 가까운 ‘숲세권’ 같은 조건) 등 자연 외적 조건이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도시 생활에 적용되는 이런 현대적 요소보다, 학교도 지하철역도 공원도 없었을 때 옛사람들이 정한 삶터에 더 눈길이 간다.

오래 된 동네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자연 환경을 갖고 있다. 물과 볕이 좋고 바람이 잘 통한다. 산세가 안정적이고 주변의 마을과 잘 연결된다. ‘양택(陽宅)을 잘하면 당대가 성하고 음택(陰宅)을 잘하면 만대가 성한다’는 옛말이 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잘 살게끔, 죽은 사람은 잘 쉬게끔 만들어주는 터가 좋은 곳이다. 그래서 집터 위에 집터가 있고 무덤자리에 무덤이 들어서는 게 관습이었다. 왕궁 터인 월성에 켜켜이 왕조의 터전이 자리 잡은 것도 같은 이치다.

산업 구조가 재편되어 농촌이 무너지고 도시집중화와 개발 바람이 불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무덤을 밀고 아파트를 짓고, 왕궁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공장을 지었다. 삶과 죽음이, 성과 속이 뒤엉켰다. 그곳에는 오직 하나의 힘과 그가 세운 질서가 존재하나니, 돈, 돈뿐이다.

형산강을 따라 경주로 들어오면서 경주의 물길이 궁금해졌다. 선사유적이 있는 암사동이 한강 유역에 자리한 것처럼 물이야말로 사람살이의 기본 중 기본 조건이다. 물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먹고 씻고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고대 도시들은 자연스럽게 큰 강을 끼고 형성되었다.

서라벌 또한 18만 호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살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했을 테고, 천년의 수도로 존재할 만큼 충분한 수량이 보장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가며 살펴본 경주 도심의 하천은, 겨울이라는 계절적 조건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빈약하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만 검색해 보아도 경주의 물 부족을 염려하는 기사들이 쏟아진다.

일설에 의하면 덕동댐과 보문호가 생기면서부터 이런 현상이 시작됐다고 한다. 주요 하천의 흐름을 막는 댐이 상류에 2곳이나 생기니 경주 도심의 하천이 건천이나 다름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북천에 퇴적물이 쌓이면서 흐르는 물이 부족해졌다고 한다.

북천, 남천, 서천 등이 합류해 북쪽의 형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경주는 결코 물이 부족한 도시가 아니었다. 큰비가 내리면 하류가 범람하는 일이 빈번했다.

‘삼국사기’에는 아달라 5년(158), 알천(북천)의 물이 넘쳐 금성의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 유례이사금 7년(290)에는 여름에 큰 물난리가 나서 월성이 무너지기까지 했다.

이외에도 ‘홍수’에 대한 기록은 차고 넘친다. 물난리에 민가가 떠내려가고 백성들이 표류하니 피해를 줄이기 위한 갖가지 방책이 동원되었다. 7세기 진흥왕 이후 천주사, 봉성사, 인용사, 분황사, 임천사, 동천사 등의 사찰을 천변에 건축한 것도 부처님의 염력으로(혹은 제방의 성격으로) 수해를 막아보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근대까지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비보숲은 풍수적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하는 숲이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경상도 71개 군현 가운데 비보숲이 가장 많은 곳이 현재의 경주 시내였다. 그리고 그 15곳 중 7곳이 수해방지용으로 북천 주위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연히 생활용수도 풍부했다. 지금까지 경주 지역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우물은 230여기에 이르는데, 그중 신라 우물은 60여기 정도라고 한다. 애당초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나정(蘿井)’에서 탄생했고, 혁거세의 부인 알영 또한 ‘알영정’, 즉 우물에서 태어났다. 그만큼 우물은 신성한 곳이었고 왕조 대대로 제사를 바치는 장소였다.

월성 안에 보존된 우물은 숭신전지 부근의 것이 유일한데, 연꽃과 안상(眼象:코끼리 눈 모양)이 새겨진 사각 우물이다.(월성 우물은 수풀 속에 있어서 일부러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나 또한 직접 보지 못하고 자료로 확인했다) 이와는 별개로 동궁과 월지의 동쪽 우물에서는 4구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제례의 인신공양이라기보다 고려시대에 신라와 관련한 사람이 희생(어쩌면 살해)되어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물 소비가 많았을 월성은 물론이거니와 주거지의 집집마다 깊은 우물이 발견되는 것은 서라벌에 물이 풍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랜 세월 물의 도시였다가 이제는 물 부족 도시가 되어버린 경주, 그 안타까운 목마름으로 월성의 물길을 더듬어본다.

월성의 해자는 말라있다. 아무리 수로(물길) 형태의 여느 평지성 해자와 달리 수혈(웅덩이)이 배치된 것이라 해도 웅덩이 역시 흔적뿐이다. 북천, 남천, 서천의 세 물줄기를 끌어안은 월성을 직접적으로 휘감아 도는 것은 남천이다. 토함산에서 발원해 불국사와 월성을 지나 남산 밑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본래는 월성에서 형산강까지 물길이 3㎞, 폭이 70m였다는데…. 지금은 하천이라기에 심히 민망한 개천이다.

천소영 교수가 쓴 ‘물의 전설(2000, 창해)’에서는 남천을 ‘사랑이 흐르던 시내’라고 표현했다. 물의 흐름이 급해 자갈이 많은 북천에 비해 흐름이 완만해 모래가 많으니, 금빛 모래가 반짝이던 남천을 건너며 수많은 사랑의 이야기들이 싹텄으리라는 것이다.

“궁궐 남쪽의 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

‘삼국사기’ 경덕왕 19년 기사에 등장하는 두 다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속칭 느릅나무다리(楡橋)라고도 불리는 월정교는 복원되어 2018년 하반기부터 개방되었다. 복원에 대한 논란과 비판만 숱하게 듣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월정교를 건넜다. 일단 눈으로 보는 모습은 상당히 낯설다. 다리 양쪽의 문루와 지붕으로 이어진 회랑 등이 지금껏 보던(혹은 상상하던) 다리들과 사뭇 다르다.

일일이 설명하기엔 지면이 좁지만, 월성과 황룡사 등 발굴조사를 거쳐 언젠가 복원을 논의할 유적들이 모두 거칠 수밖에 없는 논란이다. 그림이나 도면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상상으로 ‘복원’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논란의 원인을 제공하는 셈이다.

차라리 눈을 감고 그려본다. 태종무열왕 때 원효대사가 이 월정교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서 다리 건너에 있던 요석궁에 젖은 옷을 말리러 간다. 이두를 만든 신라의 천재 설총이 태어나는 전설이다.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사도 남산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월정교 부근에서 경덕왕을 만나 왕의 요청으로 ‘안민가’를 짓는다. 형체가 사라지면 이야기가 도리어 선명해진다.

춘양교는 다른 이름이 많은데 일정교, 효불효교, 칠성교, 칠자교, 어미다리 등으로도 불렸다. 춘양교를 찾으려고 월성 동쪽 기슭부터 경주박물관 사이를 헤매고 다녔다. 텃밭과 쓰레기장이 뒤엉킨 가운데 박물관 맞은편 동네 골목에서 ‘춘양교지’ 표석을 발견했다. 지금의 집터가 그때도 집터였다면 춘양교는 백성들이 자주 이용하는 다리였던 듯, 민간의 야릇한 전설이 깃들어있다.

남천 건넛마을에 홀어머니와 일곱 아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어머니가 밤마다 몰래 나가 새벽에 돌아왔는데, 알고 보니 애인을 만나기 위해 남천을 건너갔다 오는 것이었다. 일곱 아들은 추운 겨울 차가운 강을 건너는 어머니가 안타까워 편히 다녀오시라고 다리를 놓았다. 어머니를 위한 일이니 효도겠으나 죽은 아비에 대한 불효인 셈이니, 다리의 이름은 ‘효불효교’였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이야기다. 전설에는 아들들이 놓은 다리를 보고 어머니가 잘못을 뉘우쳤다는 사족이 따라붙긴 하지만(당사자가 아닌 오지랖 엄숙주의자들이 붙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아들들은 어머니의 부도덕을 탓하기보다 시린 발을 걱정한다. 결국 도덕과 윤리를 뛰어넘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지니, 수풀더미 속에 버려진 춘양교가 화려한 어느 다리보다 진한 여운을 남긴다.

금장대에 서니 물의 도시 서라벌, 일렁거리고 출렁였던 신라가 비로소 느껴진다. 형산강의 절경 금장대에서는 건너편 경주 시내로 흐르는 북천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신라 때 금장사가 있던 금장대는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의 배경이자 석장동 암각화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장대 옆으로 돌아 들어가는 길에는 선사시대 부족민들이 그린 삼각형과 원형 등 기기묘묘한 문양을 만져볼 수도 있다(훼손될까 봐 만지지는 않았다. 사라져가는 ‘울주 반구대 암각화’를 생각하니 보호 장치가 없어 좀 불안했다).

강은 바다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바닷물이 먹을 수 없는 물이라면 강물은 먹는 물이라서 그런지 훨씬 친숙하다. 아들이 울주에서 발원해 영일만으로 흘러나가는 형산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이라고 알려준다. 우리나라의 강이 대부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데 비해 특이한지라, 풍수지리의 신봉자들은 후발주자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까닭이 북으로 흐르는 형산강의 기운 덕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라시대 알천으로도 불렸던 북천은 선덕왕 때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김주원이 신라의 왕 대신 나의 40대조 할아버지가 된 빌미를 제공한 하천이기도 하다. 선덕왕이 승하하고 왕위 결정을 위한 화백회의가 열릴 무렵 갑자기 내린 비로 순식간에 북천의 물이 불어 다리가 떠내려갔다. 북천 건너편에 살던 김주원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니 왕의 임종을 지킨 김경신이 원성왕에 올랐다.

‘삼국사기’에서는 혹자(아마도 김부식의 생각이겠지만)가 말하길, “임금은 큰 자리라 본디 사람이 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폭우가 내린 것은 하늘이 김주원을 세우고 싶지 않음이 아닐까?”라고 했단다.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외가인 명주로 왔으니 후손인 나도 태어난 게다. 옛날 옛적 조상의 권력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지나, 그보다는 불어올라 넘실대는 북천을 바라보며 손아귀에 들어온 파랑새를 날려 보내는 김주원 할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한다.

그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더한 욕심을 부렸다면 돌아오는 것은 피바람뿐이었을 것이다(물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과 손자 김범문은 미련을 떨치지 못했던지 후일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한다),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 ‘물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소박하고도 염결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