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어교육과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어교육과

몇 해 전의 일이다. 졸업생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지난 4년간을 되돌아보며 가장 잘한 일과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한번 물어본 적이 있다. 다들 나름대로 지난 추억들을 반추하는데, 대뜸 한 학생이 ‘남자친구랑 헤어진 일’과 ‘그를 만난 일’을 가장 잘한 일과 후회되는 일로 꼽는 것이었다. 이유인즉슨, 서로가 참 맞지 않았는데도 어쩌다보니 오래 사귀게 되었고, 그 결과 학업에 소홀했음은 물론, 주변의 관계들마저 많이 틀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옛말에, ‘빙탄상애(氷炭相愛)’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한 나라의 동방삭이 쓴 ‘자비(自悲)’라는 시의 한 구절에서 변용된 것으로, 원래는 얼음과 숯불은 용납될 수 없다는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에서 나온 것이다. 차가움/뜨거움이라는 상반된 성질의 물(物)이 만나면 얼음은 녹고 숯은 식게 되니, 본질이 서로 화합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함께 할 수 없는 이 둘이 서로 사랑한다니, 무슨 말일까?

함께할 수도, 해서도 안 되지만 서로 사랑하게 되어 물의를 일으킨 예는 우리의 옛 고전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세조실록’ 11년 9월 기사에는 세조의 후궁인 덕중이 조카인 귀성군 이준에게 애정 편지를 보낸 사건이 있었다. 덕중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연애편지를 보내다 발각된 주인공으로서, 당시 이 사건은 궁궐 내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또 ‘성종실록’11년 7월 9일자 기사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태강수의 아내였던 어우동이 왕실 종친들과 수차례 간통해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빙탄상애’는 이처럼 금지된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관계’를 함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살다보면, 인간관계는 종종 일그러지고 틀어지기 일쑤이다. 적극적이고 쾌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극적이고 조용한 사람도 있고, 바쁘거나 성격 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느긋한 사람도 있다. 매사 긍정적인 사람도 있고 부정적, 비판적인 사람도 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진 게 곧 인간사이다.

일면 공존하기 어려운 얼음과 숯불. 사실 인간사가 모두 얼음과 숯불의 집합체라면, 이는 곧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다름 아니다. 얼음과 숯불이 서로 사랑하려면 얼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숯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뜨거움을 받아들여야 물이 되고, 차가움을 받아들여야 재가 아닌, 숯으로 남는 과정이 된다. 이는 곧 ‘자기를 희생하는 소멸’의 과정이자 타자를 받아들이는 수용’의 과정이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너’를 받아들이면서 ‘나’의 본질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빙탄상애(氷炭相愛)인 것이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던 신혼 초의 뜨거움(炭)이 시간이 지나면서 얼음장 같은 언행(氷)으로 바뀌어 상대의 가슴을 후벼파는 경우를 많이 본다. 가슴 뜨겁게 낳은 자식(炭)이, 뒷날 봉양 및 유산 문제로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경우(氷)도 다반사고 그 반대도 수두룩하다. 아내/남편, 부모/자식 등이 모두 내가 옳니 네가 그르니 하다 서로에게 남긴 생채기들이 아닐 수 없다. 죄다 상실과 박탈감을 안겨주는 ‘빙탄상해(氷炭相害)’들이다.

관계라는 것은, ‘나’를 크게 내세우는 순간 어긋나게 마련이다. ‘남’을 세우되 ‘나’를 잃지 않을 때, ‘남’도 ‘나’를 세워줄 수 있는 법이다. 얼음과 숯이, 비록 다르지만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서로를 수용하고 인정하되, 스스로의 본질을 잃지 않았기에 조화로울 수 있는 것처럼.

바야흐로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 가족의 소중함을 한껏 되새겨 보는 날들로 가득한 달이다. 이러한 5월에, 주변의 소중한 이들을 가슴 따뜻하게 껴안는 빙탄상‘애(愛)’의 의미를 한번 깊이 되새겨 보면 어떨까? 서로 생채기내면서 허무히 소멸되는 빙탄상‘해(害)’대신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