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사진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발가락 마디에 울퉁불퉁 혹이 생긴 기형적인 발이었다. 하루 19시간씩, 1천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없어지기까지 모질게 연습을 한 결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발’이라는 설명이었다.

발이 저 지경이 되도록 지독하게 연습을 했으니 열성과 노력을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단연 가장 아름다운 발의 하나일 것이다. 사실 가장 아름다운 발레동작을 만들어낸 발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내게는 그 발이 전혀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건 왜일까. 그 의지와 노력과 열정에는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지만, 그것을 아름다움이나 감동이라기엔 어딘가 석연찮은 느낌이었다. 만일 누가 그 사진을 걸어 놓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이루어야 할 최선의 가치이고 목표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보다는 공포와 절망감을 안겨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최고지상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다. 어느 분야에서건 최고가 되는 것이 최선의 목표이고 가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승자에게 모든 것을 몰아준다. 하지만 절망스럽게도 최고가 되는 것은 노벨상을 받거나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것이 그렇듯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 훨씬 더 희박한 확률이다. 복권을 사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게 얼마나 허망한 꿈인지.

최고를 목표로 전력질주하다보면 차상이나 차하 아니면 다문 뭐라도 될 게 아니냐는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어차피 극소수일 수밖에 없는 최고의 자리를 최선의 가치로 규정한다는 건, 그래서 끊임없이 경쟁심을 부추긴다는 것은, 결코 최고가 될 수 없는 절대다수에겐 사실을 호도하고 왜곡하는 일이자 억압이나 폭력과 다를 게 없다.

흔히들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나 인기 연예인들이 자라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고 말한다. 그들이 받는 돈과 명예를 열거하면서 누구든 꿈을 가지라고 한다. 열심히 노력만 하면 누구라도 그런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운동선수나 연예인이 꿈이라는 청소년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 중에 과연 몇이나 그런 꿈을 이룰 수가 있겠는가. 대다수 아이들이 결국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꿈이라면 차라리 그런 허황한 꿈으로 생을 낭비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설령 천신만고 끝에 그런 꿈을 이루었다 한들 그게 과연 가장 바람직한 삶이고 행복일 수가 있을까. 스타덤에 오른 사람들이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마약복용이나 자살과 정신질환이 더 많다는 사실이 그 답이 될 것이다.

삼라만상 자연계에선 선악미추(善惡美醜)란 없다. 치열한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의 와중에서도 승패가 곧 선악이나 미추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승자는 승자대로 패자는 패자대로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약하고 병든 자의 희생이 없이는 결코 강한 자도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게 자연의 법칙이고. 살아남은 승자가 아름다운 것이라면 패자의 희생도 당연히 아름다운 것이다.

6·25전쟁 같은 극한상황에서는 거의 없다가, 먹고 살만해진 요즘에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절망한 자살자가 부쩍 늘어나는 건 대개가 남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나 좌절감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최고지상주의와 승자독식의 풍조가 초래한 현상이다. 결코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할 수 없는 강수진의 발에 지나치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서 기죽고 낙담하지는 말자. 하루살이 날벌레의 목숨이라고 코끼리나 사자의 목숨보다 하찮은 게 아닌 것이 건강한 자연생태계의 모습이다. 소질도 능력도 의지도 타고나지 못한 사람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라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사회라야 바람직한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