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수수필가
강길수 수필가

생이별을 당했다. 세상에, 바람에게 생이별을 당하다니 어처구니 없다. 사월 말에 불어닥친 살바람이 기습적 일격을 가할 줄이야. 흐드러지게 핀 이팝꽃을 시샘하는 심보인지, 꽃샘추위 몰고 온 살바람은 정든 벗을 낚아채 가버렸다. 있는 듯, 없는 듯 목을 감싸 안아 언제나 따사하게 하던 벗이었다. 벗을 만난 뒤로는 덕분에 감기도 거의 걸리지 않았다. 흠뻑 든 정에 가슴이 먹먹하다. 세상의 어떤 헤어짐도 서운하지 않은 게 없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생이별이기에 더욱 마음이 싸하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목이 허전했다. 저절로 목에 손이 올라갔다. 있어야 할 벗이 없어졌다. 오랫동안 한 몸으로 잘도 지냈는데, 이런 일이 닥치다니! 간혹 목에서 이탈하려 할 때는, 곧 알아채고 다시 바르게 하거나 주머니에 넣곤 했었다. 한데, 오늘은 느슨해지는 목과 벗의 틈을 왜 감촉하지 못했을까. 피부의 촉감 세포가 무뎌졌었나. 맞다. 그놈의 센 꽃샘 살바람 때문이다. 퇴근길 내내 거의 태풍처럼 느껴졌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몸 웅크리고 옷깃여며, 종종걸음에 바빴었다. 그러니 태풍 같던 살바람의 위력이, 목의 감촉 안테나도 앗아가 버린 거다.

이튿날 아침. 추적추적 부슬비 오는 날씨가 꼭 마음 같다. 잃었던 벗을 찾아 나선다. 마음 한쪽에 ‘어차피 떠났는데, 뭐 하러 빗속에 나가느냐’는 만류의 여울이 일었다. 곧바로 오래 길들여진 정의 너울이, 여울을 삼키고 온 마음에 파문(波紋)되어 밀려왔다. 우산을 쓴다. 어제 퇴근길을 역순으로, 벗이 떨어지거나 걸릴만한 이곳저곳 살피며 걷는다. 봄비 속에 자태 뽐내는 이팝꽃은 벗이 간 곳을 알까. 바람 모일만한 구석진 곳, 가로 가 화단의 화초나무 사이나 가지, 자동차 밑, 축대의 외진 곳 등 바람 방향을 고려해 다 찾는다. 사무실까지 가도 벗은 안 보였다. 책상과 근무복 주머니에도 없다. 실망이다. 아깝다. 아내에게도 미안하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나이 들면서 언제부턴가 아내가 겨울에 목도리를 하면, 감기도 덜 걸리고 좋다면서 권했다. 나는 그때마다, 거추장스럽고 찝찝해서 못한다고 버텼다. 어느 날, 얇은 화학섬유로 만든 스카프를 내밀며, 일단 한 번 목에 해 보라고 강권 하다시피했다. 보니까 정말 얇고, 큰 손수건 만하며, 색깔도 엷은 남색계통에다 둥근 무늬를 기반으로 도안한 것이어서 싫지 않았다. 목에 두르니 착용감도 좋았다. 아내의 성의를 보아서 며칠 해보기로 했다. 아내는 전에 성당 행사 때 받은 귀한 것이니,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하고 다니란 말도 잊지 않았다.

겨울은 물론 다른 계절에도 쌀쌀하거나, 감기기가 드는 날이면 어김없이 목에 스카프를 하고 다녔다. 다만, 풀리지 않게 묶지는 않았다. 매듭이 이물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스카프 대각선 모서리를 양손가락으로 잡고 당기면, 접어져 긴 삼각형 꼴이 된다. 가운데 넓은 부분을 목 앞으로 하고, 양손 쥔 부분을 목 뒤로 하여 위, 아래를 한번 뒤집어 당겨 목과 밀착 정도를 맞추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스카프는 절친한 벗이 되어갔다. 없는 듯 있어 부담 없고, 필요할 때 꼭 거기에 있는 존재, 바로 둘도 없는 벗으로 변한 것이다. 섭섭한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이런 생각이 났다. ‘오늘 봄비 속에 잃은 벗을 찾는 일을 벗, 스카프에게 바치는 예(禮)로 삼자!’고…. 사람이나 절대자에게만 예를 바치라는 법은 없으니까. 또 정든 벗 잃었으니, 예를 갖추는 것이 옳다는 마음 추임새도 생겼다. 큰 나무나 바위 같은 자연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했던 선인들의 토테미즘도, 미신으로만 터부시할 일은 아니리라. 어떤 존재가 뜻을 갖기 위해서는, 뜻을 부여할 수 있는 의식(意識)의 소유자가 그 존재에게 뜻을 부여할 때만 생겨나는 법일 테니까 말이다. 돌아올 때 벗을 한 번 더 찾아보는 행동이, 마치 예에서 올리는 행위기도로 여겨졌다. 결국 벗, 스카프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기도가 우러났다.

“벗, 스카프야! 부디 어느 아리따운 소녀의 새 벗으로 부활하여, 더 아름다운 또 한생을 살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