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첫 번째 소설집 ‘납함’

근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문학가 루쉰의 사진.

물론 인간의 삶 속에 ‘절망’이나 ‘희망’이 본래부터 확정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희망’이나 ‘절망’은 개개의 사람들이 다가올 미래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는 태도와 관계된다. 사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되던 삶을 유일하게 반짝거리는 것이 되도록 만드는 ‘희망’이나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절망’의 상태가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린 것”이라는 식으로 편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절망이든 희망이든,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 그러한 요소를 진단하고 그러한 상태에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맞춘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가오는 현실은 언제나 더 치명적인 것이다.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확신이 타인의 희망을
꺾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자신의 첫 소설인 ‘광인일기’를 완성했던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무언가를 위해서인지도 모르게 바쁘게 어떤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 또 가끔은 가는 길을 멈추고 길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곰곰 생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면서 동시에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는 없다. 달리기 선수가 결승점을 향해 달려 나가면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달리고 있는가 하는 것을 동시에 알 수는 없는 것처럼 축구선수가 축구를 멈추고 자신에 대해서 가만히 생각해보아야 자신이 지금 골대 앞에서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영역과 그것이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가 하는 조망하는 영역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내 작은 방 구석에 놓여 있는 화분 속 식물은 빛과 물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자신이 담고 있었던 모든 가능성을 발휘하여, 그 작은 몸을 애써 새로운 싹을 틔운다. 자연스러운 생명의 작용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신에 대한 증명과 타인과의 경쟁으로 점철된 하루의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누구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저녁이 되어, 잠시 치열한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삶이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그것에는 희망이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때로는 그 ‘희망 없음’에 절망하기도 한다.

1923년 발간된 루쉰의 제1소설집 ‘납함’. ‘광인일기’와 ‘쿵이지’, ‘아큐정전’ 등이 대부분 이 소설집에 실려 있다.
1923년 발간된 루쉰의 제1소설집 ‘납함’. ‘광인일기’와 ‘쿵이지’, ‘아큐정전’ 등이 대부분 이 소설집에 실려 있다.

이렇게 삶의 궤도에서 잠시 내려와 있는 시간에, 우리가 ‘인생론’이나 ‘자기계발론’에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시간이 흐르는 대로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 하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처음이기 때문에 내가 향해가고 있는 길이 의미 있는 길인지 그 속에 ‘희망’이 있는지 하는 것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번잡한 술자리에서 큰소리로 짐짓,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의 눈동자에 어려 있는 확신은 사실은 불안함을 이겨내고자 자신을 단련한 결과에 불과하다. 우리의 말은 ‘희망’을 말하지만 그 말속에 담긴 ‘희망’은 이 세상에 그것이 존재한다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가. 또 우리의 사회는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가. 우리가 조망하는 삶의 이상은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펼쳐져 지평선을 만들고, 이상을 말하는 우리의 말과 글은 논리에 따라 전개된다. 그렇게 삶의 방향성을 향해 여러 가지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이 서로 교차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관점을 만드는 것이다. 중세 이후 신의 언어를 대신하는 인간의 의미와 가치에서 희망을 발견했던 르네상스의 인간들이 그러했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군중’ 속에서 그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동시에 ‘군중’ 바깥에 존재하는 현대인들에 대해 조감하는 시선을 갖고자 했던 보들레르 같은, 파리의 산책자들의 불가능한 꿈이 그러한 것이었던 셈이다.

지금까지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이상이나 희망을 말했던 많은 작가들이 있었지만 아마도 중국의 소설가 루쉰(魯迅·1881~1936)만큼 ‘희망’에 대해 조심스러운 견해를 가졌던 작가는 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연한 태도와 큰 목소리로 절망적인 상황과 그 속에 존재하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자연스레 마음이 기울고 그에게 막연한 기대를 걸어보고 싶어지게 되지만, 차분한 태도와 떨리는 목소리로 만연한 ‘절망’과 ‘희망’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과는 차를 한 잔 나누면서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의 근거에 대해서 대화하고 싶어진다. 루쉰은 바로 결코 섣부른 절망이나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 그러한 작가이다. 작은 서가를 뒤져, 루쉰의 소설집 서문의 한 대목을 작게 소리 내어 읽어본다.

1922년 러시아의 시인이자 에스페란티스트인 바실리 에로센코가 방문했을 때의 사진. 아래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루쉰, 네 번째가 에로셴코. 아래 왼쪽에서 세 번째가 루쉰의 동생 저우쭤런이다.
1922년 러시아의 시인이자 에스페란티스트인 바실리 에로센코가 방문했을 때의 사진. 아래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루쉰, 네 번째가 에로셴코. 아래 왼쪽에서 세 번째가 루쉰의 동생 저우쭤런이다.

“가령 말일세. 창문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쇠로 된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네. 오래지 않아서 모두 숨이 막혀 죽을 거야. 그러나 혼수상태에서 사멸되어 가고 있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 따위는 느끼지 못할 걸세.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비교적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켜서, 그 소수의 불행한 이들에게 구제될 수 없는 임종의 고초를 겪게 한다면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몇 사람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비록 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희망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말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없다고 하는 내 확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그에게 글을 쓰겠다고 응답했다.

-루쉰, 김시준 역, ‘제 1소설집 <납함>의 자서(自序)’, ‘루쉰소설전집’,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6, 8-9쪽.

‘쇠로 된 방에 대한 비유’로 알려진 이 대목은 ‘희망’이나 ‘희망’을 말하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 가장 잘 알려준다. 루쉰은 식민지 상황에 놓여 있던 중국인들의 몸이 아니라 정신을 새롭게 바꾸기 위해서 문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를 위해, 자신이 생각했던 사회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잡지 ‘신생(新生)’이라는 야심찬 기획을 준비하였지만, 그 기획은 결국 여러 가지 현실에 부딪혀 아예 좌초되어 버렸다. 처음에 의기투합했던 세 명의 사람마저 장래의 꿈을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적막 그 자체였다. 그곳에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상의 삶에서 희망을 갖는 것은 누구에게나 나쁜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소리 높여 말하여, 아마도 그 희망이 없었다면, 희망도 절망도 아니었을 사람들을 깨워 깊은 절망을 경험하도록 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 것인가 루쉰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고민들은 사회적 이상을 말하거나 계몽을 말하는 정치가들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고민일 것이다.

그럼에도 루쉰은 자신의 고민에 대한 친구의 발언을 듣고, 희망은 미래를 향해 있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으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확신이 타인의 희망을 꺾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자신의 첫 소설인‘광인일기’를 완성했던 것이다.

루쉰의 소설들은 대부분 섣불리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정치가든 소설가든 누구나 희망이나 절망을 입에 올릴 수 있지만 자신의 말 속에 담긴 그것이 아직 그러한 적막과 고독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예민하게 자각하고 있는 작가는 그가 유일하다. 분명 그는 ‘희망’을 말하기 망설이고 있는 작가이며, 그 망설임은 작가에 대한 신뢰로 되돌아온다.

당시 여느 중국인들이 그러하듯,‘정신적 승리’로 살아가다 나름의 이유로 대인의 댁에, 또 나름의 이유로 혁명당에 가담한 아큐나, 주점에서 일하면서 살아가는 소년에게 굳이 문자 쓰는 법을 알려주고 싶어 했던 쿵이지가 발견한 희망은 모두 각자 나름의 ‘희망’을 구성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결국 누군가 발견한 희망-있음과 희망-없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오늘만큼은 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말해보는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